머리 위의 작은 집

모자 디자이너

by 박나킨

나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암기 과목만 벼락치기로 공부해 늘 딱 중간 정도.


어릴 적,

마르고 날렵한 체형 덕에 체조 선수 제안을 받았지만 집에서 반대.

미술 하고 싶다고 했지만 반대.

반장, 부반장도 반대.


"돈 많이 들고 힘든 건 하지 마."

엄마의 말이었다.


전교 1등을 도맡던 언니도 학원은 없었다.

과외, 학원 한 번 안 다니고도 상장과 메달을 쓸어 담았다.

글짓기, 그림, 수학 경시대회... 못 하는 게 없었다.

나는?

공부가 안 되니 예체능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어중간했다.


늘 중간에서, 뭘 잘하는지 몰랐다.

세 살 터울 언니의 옷을 물려 입으며 컸다.

신발도, 교복도, 책도.

그래서 일부러 다른 고등학교를 택했다.


'이번엔 새 교복을 입을 수 있을까?'

언니 친구의 교복을 물려 입었다.


공부 머리만 물려받지 못했다.

내가 언니를 이길 수 있는 건 뭘까?

나를 알고 싶었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조각, 조각으로 나뉜 생각과 자아를 맞추고 싶었다.

혹은, 숨고 싶거나.


의류 쇼핑몰에 나와 바로 패션디자인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 디자인 학원 졸업 후,

운 좋게 바로 동대문 모자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와, 내가 새로운 디자인을 해볼 수 있겠지?"

"내 모자를 지디가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패션 화보랑 콜라보까지 한다면?"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동대문은 싸게, 많이 파는 게 목적이었다.


평화시장 안 모자 도매상만 해도 몇 백여 곳.

신상은 일주일에 한두 개.


모자 틀은 이미 정해져 있다.

색을 바꾸거나,

원단을 바꾸거나,

글씨체를 바꾸거나,

장식을 덧붙이는 정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단가는 100원이라도 낮아야 한다.


나는 원래 모자를 좋아했다.

서태지가 쓰던 빵모자, 캡모자를 따라 쓰던 시절부터.


모자 속은 나만의 작은 집 같았다.

머리를 감싸주고, 화장하지 않은 날도 감춰주는, 나를 보호해 주는 공간.


아빠의 큰소리, 엄마의 잔소리,

언니에 대한 열등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캡모자, 비니, 버킷햇, 페도라... 모자마다 다른 세상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걸 직접 디자인할 수 있다니, 처음엔 황홀했다.


하지만 현실의 디자인은 액세서리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필수품이 아니라, 싸게 대량으로 팔려야 하는 상품.


어느 날,

사장님은 옆 가게에서 잘 팔린다는 모자를 툭 던졌다.


"똑같이 만들어. 단가는 100월이라도 더 싸게."


나는 망설였다.

다른 디자인 참고도 하고 모방도 한다.

샘플 모자를 사서 변형도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친한 사장님의 것이었다.


"이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못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웃었다.

"넌 무슨 예술하는 줄 알아?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니야. 잘 팔릴 만한 상품 만드는 거야."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생각한 '디자이너'와 현실의 '디자이너'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무엇을 꿈꿨던 걸까.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스케치를 휘갈기던 나만의 판타지?

나만의 로고와 시그니처가 새겨진 라벨을 붙이는 상상?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창조?

예술?

모방?

대답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안다.

머리 위 작은 집 속에서

여전히 나를 지키기 위한 투쟁 중이라는 것을.

언젠가 이 집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나는 다시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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