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옷, 반품해 주세요.

의류 쇼핑몰 CS

by 박나킨


초등학교 시절,

매년 학교에서는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 했다.

그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아이들의 꿈을 반영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 생활기록부에 한 줄 더 채우기 위한 장식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매년 다른 직업을 적었지만,

두세 해에 한 번은 꼭 돌아오는 답이 있었다.

스타일리스트 혹은 패션디자이너.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행위가 멋져 보였다.

게다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 디바의 노란 워커와 헐렁한 바지, 보이런던 재킷까지 따라 입던 시절.

귀밑 단발머리에 똥글뱅이 안경을 낀, 키 작고 통통한 소녀에게 어울리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늘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캐나다에 가서야 알았다.

거기에는 ‘유행‘도, 눈치도 없었다.

사람들은 제 취향대로 옷을 입었고, 눈길조차 남에게 주지 않았다.


그 자유 속에서 나는,

아기 같은 팔뚝살과 불룩한 뱃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어나 처음으로 나시티를 입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너 달라진 거 같아. 좀 과감해졌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헤어숍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헤어디자이너가 아닌 데스크 실장으로

11명의 디자이너, 20명의 스태프, 하루 백 명이 넘는 손님들의 매장과 제품을 모두 관리하는 일이었다.


명동 특성상 옷 잘 입는 사람들이 많아, 매일이 패션쇼 같았다.

헤어디자이너 역시 연예인처럼 옷차림 하나하나가 신뢰였고, 회사 역시 그것을 요구했다.


이후 캐나다 유학 상담원으로 취직했을 때,

‘단정하다 ‘는 기준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양말은 왜 저래?”

“팔찌는 빼야지.”

“구두는 너무 튀잖아.”

내겐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 팀장 눈에는 지나치게 특이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통통 튀었다.


혹시 죽기 전에,

나 어릴 적 꿈, 뭐 그런 걸 이루라는 신호인 걸까.


하지만 어떻게? 다시 학교에 들어가야 하나?

돈도,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현장부터 부딪혀 보자.


온라인 쇼핑몰에 이력서를 넣었다.

MD와 스타일리스트에 지원했지만, 전공, 경력, 경험은 없을 무! 그야말로 전무! 당연히 탈락.

결국 텔레마케터 경험으로 CS 면접을 보게 됐다.


“지원은 CS로 했는데요,

사실 스타일리스트나 MD 쪽 일을 하고 싶습니다. 혹시 나중에 막내나 잡일이라도 필요하면 옮겨갈 수 있을까요? “

면접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막내를 뽑긴 하는데 지금은 자리가 없어요. 나중에 자리 생기면 옮겨드릴게요.

지금은 CS로 바로 출근 가능하신 거죠? “

“네! 꼭 부탁드립니다. 바로 출근 가능합니다.”


그때부터였다.

전화벨만 울려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폰포비아에 걸린 건.


당시엔 카톡 상담이나 채팅창도 없던 시절이었다.

홈페이지 게시판과 전화가 다였다.

하루 천 개가 팔리면, 반품만 백 개.

“배송 언제 돼요?”

“환불 왜 아직 안 됐어요?”

쉼 없이 전화를 받아도 돌아오는 말은 “왜 이렇게 연결이 안 돼요!”였다.


3개월이 지나도, 6개월이 지나도 막내 자리는 열리지 않았다.

늘 반품 담당이었다.

담배 냄새, 향수 냄새, 음식 자국 묻은 옷을 확인하며 환불 불가 통보를 해야 했다.


“입지도 않았다니까요!”

“사이즈 맞는지 걸쳐보지도 못해요?!”

“입었단 증거 있어요?”

억지 항변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사라진 택배비를 내 돈으로 메꾸기도 했다.

점심값을 아껴 매일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싸우기 싫은 날에는 고객 택배비를 대신 냈다.


회사는 점점 커져 강남 6층 짜리 새 건물로 이사했지만, 내 꿈은 제자리였다.

그만둘까.

그런데 팀장은 곧 막내 스타일리스트를 뽑을 거라 했다.

더 참아볼까.

어느 날, 새로운 MD가 들어왔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MD가 되셨어요?”

“패션디자인과 졸업 후 바로 취업했죠.”

“전공이나 경력 없으면 못 들어가나요?”

“못하는 건 아니죠. 학원이나 인맥으로 들어가기도 해요.”


아, 학원. 바로 그 길이었다.


드디어 스타일리스트 막내 모집 공고가 떴다.

팀장에게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안 돼. 넌 못 버틸 거야. 얼마나 힘든지 알아? 양말부터 속옷까지 다 입혀야 하는데 경험 없는 네가 할 수 있겠어? “


그 순간, 망설임은 사라졌다.

“저 그럼 그냥 관두겠습니다.”

눈앞 모니터에는 [패션디자인학원]이라는 검색어가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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