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전문 유학원 상담사
내 마음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 빛은 아직도 붉고, 생생하다.
나는 왜 그곳을 아직 기억하는 걸까.
정말 잊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잊지 않으려 애쓰는 걸까.
아마도 그때의 나를 추억하고 싶은 욕망이 가장 크지 않을까.
처음 맞이한 하늘은 놀라웠다.
유난히 파랗고, 고개가 꺾일 만큼 유난히 높았다.
서울의 하늘은 늘 낮고 답답했는데,
그곳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이곳이 바로 단풍의 나라구나.
빨간 벽돌 건물 사이 초록 지붕이 얹힌 집들,
마치 동화 속 앤의 집 같았다.
“내가 이런 곳에 산다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잠깐이었지만,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서울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가
낯선 땅 캐나다에서 처음 며칠은, 그리움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향수병이 이런 거구나, 중얼거렸다.
말도 서툰 이방인.
눈만 마주쳐도 긴장했고, 모든 걸 경계했다.
다행히 어학원에는 한국인들이 절반 정도 있었지만,
길을 걸으면 뒤에서 들려오는 한국말이
안도이자 불행 같기도 했다.
매일 낯설었고, 매일이 고난이었다.
그러나 매일 새로웠고, 매일이 꿈같았다.
그 시간은
떫던 기억이 알맞게 익어
입 안을 적시는 과일이 되었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다시 맛보고 싶은 시간.
거기엔 자유가 있었다.
양복 차림에 벙어리장갑을 낀 손,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는 태도,
문을 먼저 열어주던 낯선 이의 미소.
지금 돌아보면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것들을 전부 자유라 불렀다.
저녁이면 거리엔 고요가 내렸고,
나는 그 고요에 서툴렀다.
하지만 곧,
고요가 나를 물들였다.
“뭐 할까?”
“공원 산책할까?”
공원에는 산책하는 가족, 뛰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있었다.
낯설던 풍경은 이내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때 처음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평온이라는 단어를 알았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달랐다.
취업 전선 한가운데서,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일단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것이 내 앞길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잠시라도 버틸 수 있다면 매달렸다.
발만 동동, 손 젓는 법조차 몰라,
허둥지둥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운 오리 같았다.
더디게라도 같이 저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그래, 다시 단풍의 나라로 가야 한다.
거기 서라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단풍잎이 그려진 간판을 따라 ‘캐나다 전문 유학원’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실적'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눌렀다.
말은 자꾸 꼬였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압박은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늘 긴장했고, 늘 떨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캐나다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얼굴들.
상기된 표정, 기대와 설렘.
상담을 받으러 온 학생들의 눈빛은 부러움이었다.
다시 나였으면, 하는 마음.
그저 대리만족 밖에 할 수 없었다.
설명은 차분히 이어갔다.
학원, 지역, 생활.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추억만으로는 실적이 되지 않았다.
학생을 등록까지 이끌어야 하는 자리.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아름답고 똑똑했지만, 속은 다급했다.
'안 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상담은 학생이 아니라 내 마음이 더 필요했다.
상담, 실적, 업무의 압박보다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팀장은 출근할 때마다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좀 단정하게 입어라. 그 양말 색상은 뭐냐.”
일보다 옷차림이 문제였다.
나는 개성을 존중받고 싶어 캐나다를 그리워했는데,
개성을 억누르는 곳에서 일하자니 숨이 막혔다.
매일의 지적은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그곳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서른을 앞둔 어느 날,
문득 오래된 노트 한 장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었던 꿈.
결국 나는, 단풍의 나라에서 시작된 마음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