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희 May 27. 2024

1997년, 두시의 데이트

   

 그곳은 직원이 고작 네 명밖에 안 되는 작은 회사였다.  그나마 직원들이 외근을 나가면 사무실엔  혼자였다. 20대 초반에 잠깐 다녔던 물탱크 회사, 업무는 전화받는 일과, 한 달에 한번 셈한 돈을 봉투에 넣어 직원들 월급을 주는 일이 전부였다. 거의 사무실 문지기나 다름없었다.


  재채기가 나도록 꽃가루가 날리는 오월이었다. 남자친구가 제대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달뜬 얼굴로 지내던 어느 하루, 그날도 퇴근 후 데이트 할 생각에 붕붕 떠서 시간만 세고 있었다. 혼자뿐인 사무실이 적적해서 틀어놓은 라디오를 타고 폭신폭신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의 데이트, 차돌같이 단단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김기덕 진행을 맡아오며 장수 기록을 세우다가 몇 명의 진행자를 거쳐 당시에는 이문세가 바통 이어받아 진행하고 있었다.

 여러분, 저 이문세가 다음 주에 드림랜드에서 콘서트를 합니다. 팩스로 지금 바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저희가 좋은 사연을 채택해서 콘서트티켓을 두 장씩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름답고 뭉클한 이야 많이 보내주세요.

 혀를 날름거리며 아랫입술을 축이고 사연을 써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저는 인천에 사는 선희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가 제대를 했어요.  2년 2개월, 두꺼운 시간 동안 한 눈 한번 안 팔고 기다렸답니다. 존재만으로 초롱한 남자친구와 꼭 오빠의 콘서트에 가고 싶어요. 제 사연이 선택된다면요, 아직도 걸음걸이에 절도가 남아있는, 바짝 치켜 깎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친구의 팔짱을 꼭 끼고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신청곡은 이문세의 <굿바이>입니다.


  멋을 낸 글씨가 꾹꾹 눌려있는 용지둔탁한 팩스기계넣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뒤 문세오빠의 목소리를 타고 들리는 이름, 허리를 곧추세우고 볼륨을 높였다. 흔하고 특색 없는 이름이 일순 꿀을 바른 듯 달콤해졌다.

 인천시 ○○ 구에 사시는 김선희 씨, 남자친구랑 꼭 오셔서 좋은 추억 만드시길 바라겠습니다.

 자분자분한 말소리에 작은 사무실이 촉촉하게 젖어버렸다.

 

  

 

  

  



이전 03화 그녀의 웃음소리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