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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May 20. 2024

그녀의 웃음소리뿐

 따뜻한 기운에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봄날, 중학교 때의 기억이다. 그날 5교시 수업은 그야말로 곤혹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에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더해져 천하에 악바리 우리 반 1등 효정이 마저 밀려오는 춘곤증을 어쩌지 못하고 진물이 나올 만큼 눈자위를 연신 비벼댔다. 그렇게 육십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마의 5교시, 국사시간이었다. 국사선생님은 40대 중반정도 되는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중키에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흔한 인상의 아줌마였다.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 만큼 엄한 선생님이었고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자세가 좋지 않은 학생은 눈뜨고 못 보는 까다로운 분이었다. 우리는 잘못하다간 차디찬 복도로 쫓겨나거나 손바닥이 화끈거릴 만큼 맞을 수도 있다는 게 학습되어 있었다. 국사시간만 되면 머리로는 딴생각을 할지언정 눈동자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해야 했다. 하지만 그날은 눈을 뜨기조차 힘들 만큼 졸음이 무섭게 교실 안으로 뿌려졌다. 그것은 마치 화생방훈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처럼 모두에게 남김없이 흡수되었다. 그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던 선생님은 입을 쩝쩝거리다가 책을 소리 나게 덮어버렸다.

 “반장, 나와 봐.”

 우리 반 반장 미순이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머슴 같은 친구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씩씩했으며 쭈뼛거리는 일 따위는 없는 아이였다. 반장은 요란하게 의자를 뒤로 밀고 교실 안의 정적을 모조리 깨부수며 뚜벅뚜벅 선생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앞에서 졸고 있는 친구들을 감시하라고 부른 것이거나 흐트러진 수업분위기 때문에 대표로 매 타작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압력밥솥 안에 갇힌 수증기처럼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선생님의 눈빛은 온화해 보였다.

 “노래나 한곡 해봐.”

 “네?”

 대장부 미순이도 갑작스러운 지령에 멋쩍었는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기대에 찬 친구들의 눈을 의식한 미순이가 몇 분을 망설이다가 더 이상 뜸 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작게 노랫소리를 흘려보냈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에 빗소리  

   

 가슴부터 끌어 오르는 발성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야들야들한 목소리에 조용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노래는 묘하게 한 편의 시처럼 가슴을 적셨다. 노래를 마치고 뻘쭘하게 서있던 미순이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표정은 갑자기 소녀가 되어 버린 듯했다.

 “와! 이거 누구 노래니?”

 친구들은 신이 나서 이문세라는 가수의 이름을 외쳐댔고 선생님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눈망울로 다음 곡을 채근했다.

 “이문세? 또 다른 노래는 없니?”

 친구들은 입을 한껏 벌리고 노래를 하는 새들처럼 신이 나서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 등의 제목을 짹짹거렸고 선생님은 턱을 치켜올리며 두 번째 곡을 부르라는 신호를 던졌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와!  이 노래도 너무 좋은데? 근데  앞서 부른 노래가 더 좋다. 그 노래 제목은 뭐였어?”

 “그녀의 웃음소리뿐이요.”

 “그녀의 웃음소리뿐?”

 잊으면 안 된다는 듯 노래제목을 시를 읊듯 여러 번 읊조리는 선생님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그 모습은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교실에 울려 퍼진 그녀의 웃음소리는 사지를 펴고 흐드러져 있는 봄꽃들보다 환하게 반짝였다. 학교화단에 활짝 핀 목련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교실 안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무서운 카리스마가 걷혀버린, 이문세의 노래에 빠져버린 선생님의 얼굴은 심지어는 한없이 예쁜 소녀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미순이의 목소리로 듣던 <그녀의 웃음소리뿐>과 순수한 웃음을 머금고 이문세의 노래제목을 외치던 육십여 명의 소녀들, 머릿속에 따분한 한국사의 계보 따위만 꽉 차 있을 것 같았던 국사선생님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은 목련꽃이 피는 계절마다 줄곧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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