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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n 27. 2022

어머님의 반전

어머님이 말했다.

" 내가 있잖니. 예전에 얼마나 뚱뚱했는지 아니? 너무 뚱뚱해서 있잖니. 누가 우리 집에 찾아올라믄 동네 사람 아무나 붙잡고 여기 뚱뚱한 아줌마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단번에 우리 집을 알려줬단다."

" 지금보다 더 뚱뚱하셨었어요?"

" 지금은 홀쭉한겨.예전엔 말도 말어."(껄껄껄)


아이들이랑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 엉덩이를 보고 회색 고무줄 바지를 입었을 때의 어머님의 엉덩이를 떠올리며 혼자 웃었던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인사를 갔던 날 뵈었던 그날부터 쭉 그렇게 어머님은 그 푸짐한 몸매를 유지해 왔다. 아이들에게도 어머님은 친할머니라는 호칭보다는 그냥 뚱뚱한 할머니로 통한다.


그런데 얼마 전 시댁에서 청소를 하다가 오래된 흑백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20대 초반 정도의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건강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아가씨였다. 이렇게 오래된 사진이면 분명 어머님 말고는 없을 텐데 달라도 너무 달라서 도무지 매칭이 안되었던 나는 사진을 들고 가서 본인 확인을 마치고 나서 억지로 사진 속 인물과 어머님과의 닮은 점을 찾아내야 했다.

"어머님. 이 사진 혹시 어머님이에요?"

"잉. 맞아. 나여"

"정말요? 어머님 처녀 때는 꽤 괜찮으셨는걸요."

"얘는. 나 처녀 때는 날렸었어. 왜이려."


그날 저녁에 남편에게 어머님 사진 얘기를 꺼냈더니 남편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그건 정말 반전이었다.

"옛날에 어머님이 배구선수였었어."

아니. 어머님이 날렵하게 코트를 누비며 배구를 했었다니. 그래서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김연경 선수의  팬이 텔레비전 배구경기를 밤새 느라 늦게 주무시고 했었구나. 어머님의 그런 모습들이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문화센터에서 영유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엄마>라는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적이 있었는데 그 동화의 한 구절을 읽으덧붙였던 나의 이야기에 아이들보다 엄마들이 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일이 떠오른다.

"엄마는 무용가도 될 수 있었, 영화배우도 될 수 있었고, 우주비행사도 될 수 있었대. 그런데 그 걸 다 버리고 너희들의 엄마가 된 거야."


사람이 너무 뻔하고 당연한 일을 망각하고 살 때가 많이 있다. 어디 어머님이라고 처음부터 뚱뚱했을 리가 있겠는가. 어머님이라고 화려한 과거가 없었을 리 있겠는가.

어머님도 나만큼이나 많은 걸 버리고 지금의 오여사님이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님을 시어머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김선희의 시어머님이었던 것처럼. 그래도 난 아직까지도 아이들에게 옛날에 엄마가 인기가 많았었다는 등 학교에서 글 잘 쓰는 걸로 독적인 존재였다는 등  화려한 시절에 대해 얘길 자주 들려주곤 하는데 단 한 번도 배구선수였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내 신적 없으신 어머님은 이미 지금의 모습이 세월에 유착된 게 아닌가 싶다. 참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님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물어본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보았던 영화 <가위손>에서 주인공 위노나 라이더가 노인이 되어 손주들에게 과거 사랑 얘기를 들려주며 마치 과거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복해하듯 어머님도 누군가에게 맘껏 과거 속 자신을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만큼은 쇠고기를 사 가지고 가는 며느리보다는 과거를 건드려주는 며느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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