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클랜드는 겨울에 비가 오는 날이 허다하다.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혹한보다 더 견디기 힘든, 스산하게 파고드는 으슬으슬한 추위가 있다. 한국의 늦가을, 반나절이상 퍼붓던 비가 소강상태일 때의 날씨를 생각하면 된다. 한기가 부유하고, 대지에 차디찬 빗물이 흥건한 온도.
아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영어 학원에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바람에 얹어진 비는 사선으로 우산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홀라당 뒤집어진 우산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수구로 흘러내려간 엄청난 양의 나뭇잎들이 빗물이 빠져야 할 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배수구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입이 단단히 틀어막힌 채 빗물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발밑은 온통 물천지였다. 돌아갈 곳도 없는 빗물뿐인 거리. 첨벙! 운동화 속으로 물이 왈칵 들어왔다. 몸서리 쳐지도록 차가운 빗물이 쓱, 양말을 적셨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오늘 레벨테스트가 있다는 게 생각났다. 기를 쓰고 축축한 걸음으로 영어학원에 도착했다. 발이 젖은 게 신경이 쓰여서인지 수업은 고되었다. 학생들의 결석으로 레벨테스트까지 연기되었다. 젖은 운동화 속에 질퍽한 양말, 그 속에 차갑게 불어 터진 두 발. 두 시간을 어찌어찌 버티다가 수업이 끝났다. 밖으로 나와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얄밉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엔 으슬으슬 춥더니 카디건을 벗어야 할 정도로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하루에 사계절이 있는 뉴질랜드, 이 날씨가 적응될 만도 한데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고 매번 화가 난다. 잘박잘박 젖은 발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집으로 향했다. 빨리 가서 신발이랑 양말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눈앞에서 유독 걸음걸이가 가벼워 보이는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아이보리색 남방에 헐렁한 반바지 밑으로 울퉁불퉁한 종아리가 드러나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보니 그의 발에 신발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나만 힐끗힐끗 그의 다리를, 맨발을 훔쳐보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 옆에 엄마로 보이는 여자 역시 맨발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볼 때마다 눈길이 갔지만 남의 일이었다. 나도 벗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벗어볼까? 맨발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자 질펀한 신발과 양말을 신고는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집까지는 직선거리로 일 킬로 남짓, 신발을 벗어 들고 양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발바닥에 나뭇가지가 밟히고, 나뭇잎이 뒤꿈치에 붙고, 아스팔트에서 떨어진 잔해들이 꺼끌 하게 전해져 왔다.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빗방울이 두두둑 떨어졌다. 발등 위로 차갑고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재촉하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더 이상은, 비가 와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 억수같이 퍼붓든지 말든지, 그러다 해가 다시 보이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