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의 구렁텅이

by 김선희

책의 내용이 흔들렸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탁하게 결정을 이룬 찌꺼기들이 뇌를 꽉 틀어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읽었던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 보고 소리 내서 읽어보았다. 그제서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다. 내용이 머릿속을 비집고 서서히 꿈틀댔다. 젠장, 이번엔 앞의 내용들이 후루룩 날아가버렸다.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유독 그런 날이 있다.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데 잡념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들어 올 때가. 막히기 시작하면 책장 넘기는 나무를 통째로 뽑는 것 같다. 단단하고, 육중하고, 깊게 뿌리를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클랜드 도서관에서 반납일을 넘겼다는 메일이 왔다. 자동 리뉴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반납일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나만의 철칙이다.

버스를 탔다. 일부러 노쇼 도서관까지 가기로 했다.(오클랜드 도서관은 통합이 되어있어서 꼭 대여한곳에 가서 반납을 할 필요가 없다) 버스 안에서 읽고, 도서관에 자리 잡고 앉아 읽고 나서 반납하고 돌아오기로 일정을 짠 것이다. 그런데 버스좌석이 방해가 될 줄은 몰랐다. 하필 역방향 좌석에 앉은 것이다. 거꾸로 앉아서 바라보는 아찔한 풍경에 빠져 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하버브리치를 달리는데 썬틴이 옅은 차 안의 사람들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갑자기 그들의 이름과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열린 차창에 오른팔을 얹고 보조석 에밀리와 한껏 웃으면서 달리는 제임스, 둘은 보나 마나 연인 사이일 것이다. 그들은 시티에 수일 내로 폐점을 앞둔 백화점에 고별 세일을 노리고 가는 길일 것이다. 오늘 제임스에게 형형한 색상의 실크 스카프를 조르고 싶다는 듯 애밀리 표정이 한껏 들떠 있었다. 애밀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제임스의 선선한 눈빛, 오늘 그녀는 스카프보다 비싼 선물을 받게 될 것 같다. 본인 얼굴보다 배는 커 보이는 선글라스를 쓰고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금발의 리사, 그녀는 십분 뒤 폰손비의 노상 카페에서 친구 마리나를 만나 수다를 떨며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면 오클랜드의 쨍한 햇살을 받으며 둘은 오래 걸을 것 같다, 빅토리아 공원까지. 공원에는 고급스러운 대형견을 데리고 나온 키가 큰 백인아저씨도 있을 테고, 등에 땀이 흥건한 채로 뛰고 또 뛰는 사람들이 몇 있을 거야. 나무 그늘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왼쪽 한편에 시소는 여전히 썰렁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겠지? 인상을 잔뜩 구기고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대꾸하고 있는 리처드, 그는 수개월 전에 빌려준 돈이라도 받으러 가는 길일까? 잘못하다간 오늘 주먹다짐이 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쥔 주먹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느새 버스는 하버브리치를 통과하고 목적지인 글렌필드에 다다르고 있었다. 책은 여전히 한 장도, 아니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리뉴를 해야 할 것 같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서가에 꽂힌 책들 속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가시고기'를 보았다.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내용을 복기했다. 맞아, 당시 책이 300만 부가 팔렸었지? 자못 대단한 일이었어. 드라마로도 나왔었지. 아빠역할이 정보석, 다움이 역할은 유승우였어. '가시고기'가 시발이 되었다. 결국 도서관에서도 한 시간이 넘도록 밀려오는 생각들에 치이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책은 한 장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무슨 욕심인지 책 두 권을 더 빌려 에코백에 두둑하게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이번엔 역방향이 아닌 순방향의 좌석에 앉아 책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는 들지 않기로 하고. 글자들 사이로 잡념들이 또다시 팔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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