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의심 하나가 피어난 날

by 라라

13화 의심 하나가 피어난 날

미자는 강변에서 본 장면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야학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찬하는 야학에서 정순이를 은근히 챙겼다. 이름을 한 번 더 불러주고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애쓰는 정순이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정순이의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한 번 더 들어주었고 여러 번 웃어주었다.


정순이는 그럴 때마다 마음이 일렁였다. 이제껏 동석이를 키우느라, 동생들 밥을 해주느라, 중풍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정순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이 서울 남자는 새로운 세상을 안겨 주었다. 지적인 서울 말씨, 중저음의 맑은 목소리, 선하게 부서지는 웃음, 그리고 꼭 내가 독점한 것만 같은 그의 친절. 태어나 처음 받아본 낯선 관심은 정순이도 소녀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정순아, 수업 끝나고 잠깐 남을래? 선생님 좀 보고가.”


그 얼굴에서 수줍은 소년 같은 그 미소를 정순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맨날 정순이만 이뻐하는거여? 칫.”


선생님의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보려 했던 여자아이들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저들끼리 속닥였다. 그의 관심은 너무나 달았기에 정순이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공부방에 남아 기다리는 정순이의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치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도 매만지다가, 그러다가 집안일로 부르튼 손을 보고서는 부끄러워졌다. 선생님은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가… 갑자기 이것을 왜 저한테…?”


부르튼 손을 그가 알아챌까 얼른 받았다. 그 안에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그리고 공책과 연필이 들어 있었다.


“막냇동생이 있다고 들어서. 지금 여섯 살이라며?”


“선생님이 어찌케 아세요?”


“…연순 씨… 에게 들었어. 아주 귀엽다던데… 선생님도 언제 한번 보고 싶다.”


‘연순’을 발음하는 순간, 꿈을 꾸는 소년 같은 그 표정을 봐버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의 것이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은 야학을 소개하며 붉어지던 발그레한 볼에 이르렀다.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 위로 얹혀졌다.


‘설마…’


‘연순’이라는 그 이름에 공기가 낯설게 변해버렸다. 잘못 배송된 선물을 받고 설레어 버린 정순이는 선생님과 언니 사이에 오갔을 말들이 자꾸만 상상됐다. 그것들이 내려앉지 않은 체기처럼 가슴에 턱, 하고 걸렸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있을 때 미자를 마주쳤다.


“그거… 선생님이 주신 거여?”


“으응… 동석이 갖다주라고. ”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그런께… 언니한테 들었다고 하던디.”


미자는 강변에서 보았던 선생님과 연순이 언니가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꽤 여러 번 보았던 그들. 선생님의 친절을 두고 여자아이들이 뒷말할 때마다 미자는 강변의 그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선생님의 눈길에 귓바퀴까지 빨개지던 정순이를 보면서도 그랬다.


“… 언니랑 선생님 무슨, 그렇고 그런 거는 아니겄제?”


“야… 최미자! 너 또 그 소리냐? 언니는 시집도 갔는디 누가 들을까 무섭다야.”


“…그러겄지?”


정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자는 남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순이도 언니 이름을 발음할 때 번지던 선생님의 들뜬 미소가 자꾸만 맴돌았다.


며칠간 불편한 공기가 이어졌다. 공부방을 들어선 정순이는 자신을 에워싸는 공기의 싸함을 느꼈다. 차갑게 쏘아보는 눈초리에 꾸깃꾸깃 구겨지는 종이가 될 것 같았다.


‘쟈들이 왜 자꼬 나를 꼬라보는 거지? 내 얼굴에 뭐시라도 묻었을까?’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서도 따가운 시선에 자꾸 머리카락이며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수업을 받으면서도 신경이 쓰여 자꾸만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야! 이정순! 할 말 있으니까 좀 이따 끝나고 밑으로 나와.”


정순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옥경이가 차갑게 내뱉고는 휙 돌아섰다. 평소 인사조차 나눈 적 없던 아이의 톡 쏘는 말투에 뭐라도 잘못한 게 있었나 기억을 더듬으며 등으로 식은땀이 번졌다.


“정순아, 내가 같이 따라갈까?”


옆에 있던 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여.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는 거 같은께 금방 다녀올게. 천천히 먼저 가고 있어.”

도착하니 옥경이와 무리가 있었다. 선생님이 정순이를 챙길 때마다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던 아이들이었다. 학교도 다니면서 왜 자꾸 야학엔 나와서 힐끗대며 수군거리는 건지 평소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야, 이정순! 니네 언니 이름이 이연순이냐?”


“…그란디?”


언니 이름이 나오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써 눈을 맞췄다.


“야, 니네 언니 단속 좀 잘해라이?”


“그게… 무슨 소리여?”


언니와 단속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함께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야! 니네 언니가 우리 유찬하 선생님이랑 붙어 다니는 거 모르냐? 애들은 다 아는디!”


옥경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험한 말에 부인하고 싶었던 실마리를 확인해 버렸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배신감과 수치심이 정순이를 휘감았다.


“…뭐시라고야?”


“그러면 선생님이 니가 뭐시가 이쁘다고 너한테만 잘해주겄냐? 니네 집 돈 없어서 언니 시집보낸 거라며? 느그 언니도 참, 얼굴값 솔찬하다이.”


순간, 뻗어 나간 손이 옥경이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정순이는 그 힘이 험한 말 때문인지, 일렁였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야! 야! 이거 안 놔?”


구경하던 여자아이들이 들러붙어 엉켜있던 옥경이와 정순이를 떼어놓았다.


“야, 이것들아! 우리 정순이한테 뭐 하는 짓이여!”

그제야 나타난 미자. 금방 오겠다던 아이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찾아 나선 것이다. 앙칼진 미자 목소리에 한 걸음씩 떨어지던 아이들, 그들 사이에 혼란에 빠진 정순이가 앉아 있었다. 미자는 달려가 일으키고 정순이를 가로막고 서서 소리쳤다.


“야! 너희들 한 번만 더 정순이 건들면 나 가만 안 있어!”


옥경이와 친구들은 움찔하고 물러났다.


“야, 니… 니도 봤다매. 점례가 미자 니도 똑똑히 봤다고 그랬단 말이여!”


옥경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분명히 연순이 언니 아니라고 했지! 했지! 글고 연순이 언니가 선생님이랑 뭐 있는 거 니들이 직접 봤어?”


아이들은 미자의 사나운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곧 흩어졌다.


“아야, 정순아. 아프지야? 너 우리 집에 들렀다가 연고 좀 바르고 가라.”


미자는 정순이의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주고 옷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어주며 여기저기 긁힌 상처를 살폈다.


“미자야… 근디… 아까 그게 뭔 말이여? 저것들이 우리 언니… 뭘 봤다는 거여?”


정순이가 흐릿해진 눈으로 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눈엔 아직 터지지 못한 울음과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의심이 얽혀 있었다.


“…사실은… 나도 봤어. 느그 언니드라. ”


“말을… 똑똑히 좀 해보라고야!”


“…느그 언니랑 선생님이랑 둘이 같이 있더라고… 꽤 여러번… 같이 본 애기들은 입막음해 놨는디… 점례 그것이 소문을 퍼뜨렸는갑서야.”


“언니가… 선생님이랑?”


“언니가 뭐… 딱히 뭘 한 것은 아닌디… 쫌 이상해 보이긴 했어야. 그 분위기라는 것이…”


“왜 나한테 말 안 한 거여. 진작 말해 주제는!”


끝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버렸다.


“…언니랑 선생님이랑 그럴 리가 없잖애. 저것들이 괜히 질투해서 그런 거제. 내가 더 빨리 올 것인디. 어짜쓰끄나. 많이 아프지야?”


미자는 우는 정순이를 토닥이며 일으켰다. 미자의 팔에 기대어 걷는 길, 무릎은 까졌고 볼엔 긁힌 자국이 남았지만 정작 아픈 건 그곳이 아니었다.


‘연순이 언니가 그럴 리 없어…’


되뇌다가, 잘난 아버지가 숱하게 바람피워 댔던 지난날들이 지나갔다.

그 잘생긴 아버지를 똑 닮은, 누가 봐도 예쁜 언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광주 이모 말이 정말일까.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했던, 팔려 간 신부가 떠 올랐다.

‘나라도…’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억울함도 올라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난… 언니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선생님 앞에서 수없이 두근댔던 순간들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 언니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깨질까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정순이는 끝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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