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연을 가장한 만남

by 라라

제 12 장. 우연을 가장한 만남



연순이는 장을 보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나마 숨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연순이는 반찬거리를 핑계로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강변을 거닐었다. 그 시간이 그나마의 낙이었다. 연순이를 살게 했다.


그런데 찬하를 우연히 만난 이후로 며칠 동안 장에 가지 못했다.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밖을 나서면 왠지 그가 있을 것 같아서. 장도 보고 강변도 가자던 그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어떠한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같은 시간을 찬하는 애타 하며 보냈다. 잡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연순이가 장에 나오는 그 시간에 그 골목을 몇 번이나 서성였다. 혹시나 또 우연처럼 만날 수 있을까, 돌고 또 돌았다.


지난번의 그녀는 신기루였을까. 며칠 동안 볼 수 없자 답답했다. 내가 또 너무 성급했던 걸까, 후회됐다. 그러면서도 매일 같은자리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 무렵 백 씨 일가는 농가 일과 가게 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연순이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장에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며느리가 며칠이나 안 가고 있으니 부엌에 먹을 것이 똑 떨어진 것만 보였다.


“연순아! 엄니는 논에 가봐야 된께, 좀 이따 장에 가서 돼지고기 한근이랑 국에 넣을 채소 좀 사 오니라!”


새참을 챙기러 집을 나서며 며느리에게 일렀다. 그래서 그날은 연순이가 장에 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마주치면 그때는 어쩌지.’


주저하며 장바구니를 챙겼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자꾸 옷매무새가 신경이 쓰였다. 방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올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 마음이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었다.


땅만 보고 걸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그러다가 어딘가로부터 느껴지는 눈빛에 얼굴이 따가웠다. 그 골목에서 그가 또 우연처럼 서 있었다.


“연순 씨―”


연순이는 목소리를 따라 한번 고개를 들었다가 꾸벅,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어요.”


며칠 만에 보는 그가 좀 핼쑥해 보였다.


“…….”


연순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동안 바빴어요? 며칠 동안 장에도 안 나오고…”


“네에…”


연순이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이나 한 듯 찬하도 자연스레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걸었다.


“오늘은 뭐 살 거예요?”


“저녁거리를 좀… 이것저것이요.”


짧은 대화 속에서도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찬하는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이것저것… 살 게 있어서요. 날마다 살 게 있네요.”


그들은 장터의 골목골목을 함께 걸었다. 나란히 걷는 그 사이엔 좁힐 듯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유지되었다. 장보기를 다 끝낼 즈음, 연순이는 강변 쪽을 향해 걸었다. 그와 뭔가의 매듭을 지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와 함께 걷는 시간이 끝없이 이어지면 좋겠다, 이 만남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연순이는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져 버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 오후의 강변에서 햇살이 작은 조각으로 부서지며 물결 위에서 반짝였다. 연순이는 그 햇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심하게 흐르는 그 강물이 야속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 옆에서 찬하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연순 씨… 그거, 나에게 줘요. 내가 들게요. ”


“아니에요. 무거운 것도 아닌데…”


그녀의 장바구니를 가지고 있어야만 잠시라도 더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찬하는 기어코 장바구니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손끝이 스쳤다. 연순이는 놀란 듯 손을 거두었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연순 씨…”


“네?”


“우리, 그때 친구 하기로 한 거… 기억하죠?”


“…네…”


갑작스러운 그 물음에 연순이는 짤막한 대답만 겨우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다시 찬하가 말했다.


“그럼, 장 보러 와요. 그냥, 우린 친구니까… 친구면, 그럴 수 있잖아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왜 그의 말이 원망처럼 들리는 걸까.

왜 가슴을 쿡, 찌르는 걸까. 갑자기 미안해진 연순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연순 씨, 저 연순 씨에게 하고 싶은 말 있었거든요. 정순이랑 같이 야학에 나왔으면 해서요.”


찬하는 만남에 이유 아닌 이유를 대보았다.


“아, 저는… 아무래도…”


연순이는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별빛학당에 연순 씨 또래들도 많아요. 나중에… 시간 되면 정순이랑 같이 와요.”


“네… 그런데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연순이는 찬하에게서 장바구니를 당겼다. 이번에도 착실하게 마감 시간을 지키는 그녀를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연순 씨, 장 보러… 올 거죠?”


연순이는 다시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어떠한 매듭도 짓지 못하고 헤어졌다. 찬하는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녀린 새를 생각했다. 조심성 많은 저 새는 참 경계를 많이 하는구나, 더 천천히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연순이는 한참을 마루에 앉아 생각했다. 그가 했던 말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그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저 혼자 지레 겁먹었던 걸까. 찬하가 강심이 같은 친구라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너무 밀어냈던 걸까. 강심이와 같은 감정은 아니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다음 날 연순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밖을 나섰다. 그가 또 그 길목에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주저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저 친구일 뿐이니까.


찬하는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로 눈인사를 하고 우연처럼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은 거리가 연순이도 모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연순 씨, 요즘 정순이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알아요?”


“정말이요? 다행이에요.”


“산수도 어찌나 잘하던지… 별빛 학교에서 눈에 띄게 잘해요.”


찬하는 정순이를 꺼내며 연순이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을 다 보고 난 뒤에는 함께 강변을 걸었다. 어느덧 연순이에게서 찬하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가 하는 농담에 고개를 젖히고는 그 예쁜 얼굴을 안개꽃 같은 미소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그들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다리를 건너던 미자와 친구들이었다.


“미자야, 저기. 저 사람 별빛 학교 선생님 아니여?”


미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맞네, 맞아, 유찬하 선생님. 근데 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이미 읍내 여중학교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야학의 유찬하 선생님은 인기였다. 미자를 비롯한 몇몇 여학생들은 선생님을 보기 위해 야학에 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옆의 저 여자는 누구일까? 미자는 곧 그녀가 연순이 언니인 것을 알아챘다.


‘연순이 언니가 왜 선생님이랑 함께 있는 거여?’


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달콤함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마음 저편에서 철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혹시 연순이 언니 아니여?”


눈이 좋은 점례가 말했다.


“뭐… 뭔 소리여! 연순이 언니… 절대 아니여.”


미자는 이를 다급하게 부정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닌… 디? 연순이 언니 같은디?”


“야! 니가 정순이 친구냐? 내가 애기 때부터 정순이 친군디! 니보다 내가 더 잘 알제.”


“내가 잘못 봤으까?”


“야!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사람 들먹이지 말고 얼른 집이나 가자이. 얼른얼른!”


미자는 강변의 두 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친구들을 양 떼 몰듯 몰고 갔다.


‘아… 아무래도 이거… 이상한디? 정순이한테 말해야 쓰까?’


미자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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