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소문이 데려온 사람

by 라라

제17장 소문이 데려온 사람



마른 땅에 갑자기 내린 비로 무너진 데는 없는지, 고랑이 막힌 데는 없는지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점검하고 다닌 종복이는 축축하게 젖어 집에 들어왔다. 노동으로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지만 긴 머리를 단발로 정리한 연순이는 예쁜 데다가 상큼하기까지했다.


“우리 연순이, 머리 단발로 짤라븟네? 단발도 이쁘다야, 하긴 우리 색시는 삭발해도 이쁠 것이여. 흐흐흐.”


저녁 밥상은 뭐 그리도 차린 게 많았던지 꼭 생일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밥상은 하루 종일 절룩거린 그의 피로를 다 잊게 했다. 종복이는 밥을 다 먹고도 한 그릇을 더 먹고선 배부름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잠들었던 다음 날 종복이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처남 만석이 일로 처가댁에 다녀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리를 절룩이며 점빵에 들려 동석이에게 줄 과자를 한 아름 샀다. 또 탐진강에서 민물고기 잡이를 하는 서동길 씨 댁에도 들려 가물치도 샀다.


“장인어른― 백 서방 왔습니다! 처제, 나 왔네이”


기운차게 외치며 처가댁에 들어서는 종복이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종복이가 연순이를 색시로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연순이가 큰애기일 적부터 좋아했던 종복이는 결혼 날짜를 잡고서도 혹여나 달아날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연순이를 지켰던 지난날이 바로 엊그제만 같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던 연순이를 색시로 얻었으니, 처가 문턱에는 날마다 절하고 싶었다.


“형부, 날도 더운디 여까지 뭔 일이단가요?”


마루에 앉아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땀을 닦아 주던 정순이가 인사했다. 시든 꽃 같던 언니, 그 집에서 울고 있던 언니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형부의 무탈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언니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도 같았다.


“내가 이 집에 하나뿐인 사윈디 와봐야제. 장인어른 건강히 잘 계셨지라?”


아버지에게 부채질을 해주던 동석이도 얼른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종복이는 동석이에게 과자를 한아름 안겨주었다.


“매형, 오셨어요?”


방에서 공부하던 만석이도 기척에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누나가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저 사람이 그렇게나 미웠는데 이제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창석이는 안 보이는 구만. 어디 갔는가?”


“아… 예…”


정순이는 말끝을 흐렸다.


“하긴, 창석이도 인자 다 컸응께 친구들도 만나서 놀고 하겄제.”


무딘 남자 종복이는 정순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인지하지 못했다.


“여그, 아버님 몸 보양하시라고 저 짝에서 가물치 사 왔네. 아버님, 가물치가 기력 나는 데 좋다 하니께 맛나게 자시쇼. 아셨지라?”


“으어이… 고맙네…”


아버지는 어눌한 발음으로 간신히 대답하고 사위의 등을 연신 두들겼다. 돈이 없기도 했고, 속이 없기도 했으며, 책임감이 없기도 했던 아버지로서는, 사위의 잔잔한 애정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딸을 파니 어쩌니 뒷말이 많았지만 돈이 없어 고생한 딸자식을 부잣집으로 시집 보냈으니 아비로서 할 일은 다 한 듯했다. 그런데 그 사위가 이리도 사사로이 처가를 챙기니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선 종복이는 만석이를 앞에 앉히고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처남이랑 할 야그가 있어서 여까지 왔는디.”


만석이는 의문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가을에는 수학 경시도 있다든마, 요새 날도 더운디 혼자서 공부하느라 고생많제?”


“에이, 아니어라. 지는 공부가 젤 쉬운디요? 히히.”


“매형이 과외 선생님 구해 줄란께 인제 매형 집서 공부 한번 제대로 혀봐.”


“공부는 여기서 해도 되는디요…”


“여기는 장인어른도 아프시고 방은 좁은디 식구들은 많고, 아무래도 선생님 모시고 공부하려면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여. 매형 집은 남는 게 방이고 아주 절간같이 조용한께 공부가 절로 될 것이네. 큰누나한테 맛난 것 좀 챙겨 달라고 함시로 공부 한번 열심히 혀봐.”


“매형…”


“아따, 이왕 할 것이믄 은철인가 머신가 제대로 박살 내브러야제. 전라도에서 일등은 해브러야 않겄어? 매형이 팍팍 밀어 줄란께, 만석이가 함 다 해봐브러!”


만석이는 매형이 학교를 뒤집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느꼈던 든든함이 다시 떠올랐다. 만석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져본 그것을 그는 더 챙겨주고 있었다.


한편, 강변에서 연순이와 마침표를 찍은 그날, 찬하는 장대같이 쏟아지던 그 비를 다 맞고서 며칠을 앓았다. 사랑의 열병 때문인지 때아닌 감기 때문인지 죽도 못 넘기고 그렇게 죽을 듯이 앓았다.


“저것이 비 온 날 우산도 안 들고 미친놈처럼 그 비를 다 처맞고 댕기드만.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에 걸려가꼬 저 고생을 한다냐. 즈그 엄니 아부지 속 문드러지는 꼴 볼라고 학교도 안 간다 해싸코… 쯧쯧”


찬하가 결국엔 휴학하고 시골에 눌러앉기로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할머니는 앓는 손주를 위해 물수건도 갈아주고 죽도 끓여 주었는데 그의 깊은 괴로움까지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몸의 열이 떨어지자, 마음의 열병은 더 뜨거워졌으니 꽤 오래 앓았다.


열병이 한시름 가라앉으니 그제야 걸어볼 힘이 생겼다. 장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었다. 장으로 들어선 그는 딱히 살 게 없는데도 꼭 사야 할 것이 있는 사람처럼 시장을 돌고 또 돌았다. 이 어디엔가 그녀가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고개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발견한 익숙한 뒷모습에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시장에서 파를 고르다 말고 지나가는 여인. 그 여인은 연순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헛것마저 보이는 걸까? 그 헛것이라도 더 보고 싶다면 미친것일까?


“글쎄, 그 할멈, 오늘은 무당한테 갔다드만. 연순이 시어매 말이여.”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들려온 ‘연순’이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췄다. 시장 아줌마들이 속닥이는 목소리였다. 찬하는 무심한 척 한발 다가섰다.


“저쪽 생선 장시 딸 연순이? 그 할매가 며느리 본 지 얼마 되도 안 했는디, 손주가 안 들어선다고 그 난리더만. 그 아들이 종복이제? 그 다리 저는.”


“글제. 이쁜 연순이가 그 집에 팔려 갔다는 소문이 자자했잖애. 결혼식 날에도 애기가 얼마나 울어 쌌는지 몰러. 보는 사람도 다 눈물 나드만. 뭔 애가 그라고 맺힌 거이 많았던가.”


다른 여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근께로. 그 집 애비가 뭔 놈의 술을 그라고 마셔 싼가, 날마다 여편네 장사하는 데 가서 깽판 치고, 돈만 타 냈다 하믄 읍내 나가서 술이나 퍼 마셨잖애. 그 집 식구들은 참말로 짠했제.”


움켜쥔 찬하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결혼식, 그녀의 눈물, 그녀의 현실. 그녀의 여린 어깨에 얹고 있었던 수많은 무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근디 요즘 보믄 내가 아는 그 이삔 연순이가 맞나… 싶은 거여. 얼굴이 아주 죽상이더구만, 까칠한 것이…”


“근께로, 요즘은 웃도 않고 말도 없더라니께. 새댁이 돼가꼬 날마다 수척해져 가서… 그 집 시어매가 얼마나 독살스러운가, 말도 못한단께.”


찬하는 그 말까지 들고 시야가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문득, 연순이가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 마지막 날의 눈빛이 떠올랐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야기들, 말없이 무너지고 있던 그녀의 현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가난도, 결혼도, 아이도, 눈물도…….

그녀가 내 것이 아닌 것만을 원망했던 모든 시간이 부끄러웠다.


“근디, 그 집 종복이가 연순이한테 그라고 잘한다고 소문이 났어. 이번에 처남 과외 선생님 구한다고 저 짝에 종이 붙여 놨더만.”


“그라믄 뭐혀? 시어매가 아조 잡아먹을라고 그 난린디. 쯧쯧…”


찬하는 종복이라는 사람이 과외를 구하고 있다는 말까지 듣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과외 선생님이 돼야겠어.’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다면 제대로 미친 걸까? 모든 것을 알아버린 찬하의 그녀를 향한 마음은 설령 그 누군가가 미친놈이라고 욕해도 멈출 수 없었다.


오랜만의 단비로 공기가 조금 서늘해졌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종복이는 집을 나서다 말고 지나가는 말로 어머니에게 일렀다.


“오늘부터 만석이 우리집서 공부한께 엄니는 그라고 알고 계시쇼. 연순이는 만석이랑 선생님 오후에 오니께 맛난 거 좀 챙겨주고.”


앞뒤 사정 설명 없이 그 말만 던져놓고 아들이 나가자 열불이 난 시어머니는 연순이만 쪼아댔다.


“워메, 저 잡것은 니가 뭣이 이쁘다고 처남 과외까지 붙여 준다냐? 돈이 아조 썩어 나는구만! 저놈은 결혼하기 전부터 느그집을 그라고 뻔질나게 드나들드만 아주 논이고 밭이고 다 갖다 줘브라해라. 쯔쯧…”


연순이는 시어머니의 성난 잔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방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투박하게 챙기는 종복이에게 고마웠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도 똑똑했던 만석이를 그간 신경 쓰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지만 종복이의 따스함이 있고 나서야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연순이는 잡초였다.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버티는 것밖에 없던 잡초.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돌봄의 손길을 느꼈다. 찬하와의 그날 이후로 혼자서 시들고 있던 연순이에게 종복이의 그 행동은 다시 뿌리를 뻗을 거름이 되어 주었다.


“아침부터 속 시끄라운께 안 되겄다야. 절에나 다녀올란다!”


시어머니는 손주 소식은 들려주지 않은 며느리가 대접받는 그 꼴을 볼 수가 없어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연순이는 이 집에서 만석이가 공부한다니 누나로서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부지런히 움직여 만석이가 공부할 작은 방을 쓸고 닦아 정리했다. 그들에게 내어줄 간식도 준비했다.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만석이냐?”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다른 기척이 없고 묻는 소리엔 대답이 없었다. 연순은 손을 씻어 앞치마에 닦고 마당으로 나갔다.


“만석이야?”


“…….”


마당 끝, 감나무 그늘에 그가… 서 있었다.


그, 사람.

꿈에서라도 한 번씩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품고 있게 한 그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수만 가지의 말이 담겨 있는 눈으로 그날처럼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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