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우리가 몰래 삼킨 것들
“차… 찬하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연순의 마음은 설렘과 당혹스러움이 한데 섞여 두려움으로 소용돌이쳤다.
“…….”
찬하는 그저 그리운 사람을 보듯 한참을 바라봤다. 그간의 시간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창백하게 지친 그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그 가혹함을 준 이는 다름 아닌 연순이었기에 그녀 또한 그 절실한 그리움의 부채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요… 어서, 어서 가라구요!”
그리움과 애절함이 뒤엉킨 두려움에 젖은 연순은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더 이상 넘어서는 안 됐다. 이 선을 넘어버린다면 연순이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만석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나! 나 왔는디? 어? 선생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만석이는 마당에 있는 그를 선생님으로 알아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연순이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얼른 눈물을 훔쳤다.
“…그래. 나는 유찬하 선생님이야. 정순이 누나를 별빛 야학에서 가르치기도 했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석이에게 인사했다.
“네, 선생님. 저가 만석이어라.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래, 만석아. 앞으로 우리 열심히 해 보자.”
지켜보던 연순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저, 만석이를 오늘부터 가르치게 됐어요. 유찬하입니다. 지난번에… 야학을 소개했던.”
찬하는 곧 연순이 쪽으로 돌아 선선하게 인사했다. 그들 사이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던 연순은 곧 표정을 고쳐 지었다.
“네… 우리 집 아저씨에게… 들었어요. 만석이, 잘 부탁드려요. 안으로 들어오셔요.”
연순은 허둥대는 몸짓으로 그들을 공부방으로 안내했다.
‘누나가 왜 저라고 허둥대지?’
만석이는 어색하게 구는 누나가 참 이상했다. 그러다가 선생님 얼굴을 보곤 납득했다. 책에서만 본 ‘훤칠하다’는 그 표현이 참 잘 어울렸다. 남자인 자기가 봐도 반할 선생님은 매형이 아무리 만석이의 뒷배여도 비교가 안 됐다.
그 방에서 빠져나온 연순은 세차게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감추어야 했다. 아득해 오는 정신을 붙잡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가, 왜?’
발버둥 칠수록 자꾸만 조여드는 올가미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가 아무 일 없단 듯 선을 그었다면 나도 따라야 할까? 이 연극을 나도 해야 할까?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은 절망이 그녀를 휘감았다.
‘와― 뭐 이런 문제가 다 있어? 엄청 어렵네!’
선생님이 내준 문제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문제였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마음대로 안 풀리자 자존심도 상했다.
‘은철이가 대표 학생이었던 게 이거였어? 그래도 시작을 했으믄 내가 끝은 본다! 이걸 못 풀면 만석이가 아니여! 끝까지 해 보자, 한번!’
만석이는 문제 하나를 두고 머리에 김이 나도록 끙끙댔다. 그러다 선생님의 추가 질문을 따라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실마리가 보였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순간, 답이 뚝딱! 하고 나올 때의 그 쾌감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워낙 영특했기에 오히려 공부가 재미없던 만석이었다. 밀리지 않고 육성회비나 제대로 낼 수 있으면 다행인 집안, 돈깨나 있는 집 애들이 다닌다는 읍내의 교습소는 구경도 못 해 봤다. 학교 공부는 시시했다. 책보는 메고 오갔지만 학교에선 늘 놀 궁리뿐이었다. 그런데 선생님과의 공부는 재밌었다.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줄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처음이었다.
“만석아, 너 장난 아닌데? 이건 꽤 어려운 문제였어!”
듣던 대로 만석이는 정말 영특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았다.
“선생님, 제가 이래 봬도 소문난 수재라고요! 히히. 근디 선생님, 저도 선생님이랑 공부하니 막 재밌어요. 지금까진 죄다 아는 거라… 글서 맨 딴생각만 하고…”
연순을 향한 마음을 참지 못해 미친놈처럼 나섰던 과외 선생 자리였다. 그녀의 동생이기에 더 잘 가르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작은 배움 하나에 온몸으로 기뻐하며 눈빛을 반짝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이 아이를 잘 키워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그 집 대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들어선 사람은 정순이었다. 만석이가 과외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가 간식거리를 싸 보냈다. 정순이도 형부에게 고마웠다. 만석이의 선생님이 누굴지, 어떻게 공부할지 궁금했다.
“언니― 나 왔네이.”
“으응, 정순이 왔냐…”
창백하게 질린 언니의 얼굴엔 무언가를 감춘 듯한 기색이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엄니가 만석이 과외 한다고 이것저것 챙겨줬어. 만석이 지금 공부하고 있제?”
“누나!”
그때, 만석이가 마루로 나왔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누나의 소리에 쉬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공부 잘하고 있지야? 형부가 이라고 신경 써 주셨는께 열심히 해야 된다이.”
“누나, 공부하면 나! 아닌가? 엄청나게 재밌어. 이건 진짜 어려운 문젠데 그래서 더 재밌네! 히히!”
누구를 닮았는지 어려워서 더 재밌다니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때 과외 선생님이 만석이를 따라 나왔다. 한걸음 나선 그를 본 순간, 정순이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
정순이는 언니를 다시 쳐다봤다. 안 본 사이, 선생님 얼굴이 까칠하게 상해 있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생님은 해쓱한 그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부터는 만석이 선생님이야. 그런데 너― 계속 야학 안 갈 거야?”
언니와 선생님의 소문이 스쳐 지나갔다. 강변을 숱하게 붙어 다녔다는 두 사람, 뭔가 모를 분위기라는 게 이상했다는 그 두 사람이 이곳에서 함께 있어도 되는 걸까. 갑자기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쿵, 짓눌렀다.
“네… 이제 다시 갈게요.”
마지못해 대답한 정순이는 눈을 돌려 언니 표정을 살폈다. 어디가 불편한지 자꾸 딴 곳만 보는 언니가 자꾸 신경 쓰였다.
“꼭이다! 선생님은 이제 과외 때문에 야학엔 못 나가서 그게 아쉽네. 선생님 없어도 공부 열심히 하고! 모르는 것 있으면 만석이 과외 할 때 와서 한 번씩 물어봐. 알겠지?”
미자 말대로 정말 헛소문이었을까? 안심되다가도 뒷맛이 썼다.
“잠시만 계세요. 먹을 것 좀 챙겨올게요.”
은밀한 소문의 두 사람이건만 언니 또한 손님 대하듯 했다. 언니가 부엌에서 먹을 것을 내왔다. 새콤한 포도와 강정, 그리고 말캉하게 잘 익은 복숭아가 한데 있는 모양이 먹음직스러웠다.
한자리에 앉아 이것을 나눠 먹는 이들 사이에 희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생님의 시선은 잠깐씩 언니에게 머물렀고, 그러다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었다. 언니는 핏기 잃은 얼굴로 앉아 눈을 내리깔고 별말 없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 어색한 기류를 정순이만 느꼈던 걸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을 때, 대문 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절룩이며 들어온 사람은 얼굴이며 옷에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형부였다. 논에서 한창 일할 땐데 이른 귀가였다.
“오늘 우리 처남이 처음으로 공부하는 날인디,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제. 선생님 얼굴도 뵐라고 일찍 왔네.”
형부는 함께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이들을 보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 손에는 들꽃이 한 아름 들려있었다.
“이것은 우리 각시 닮은 꽃이여. 이쁜 내 색시!”
언니는 얼른 일어나 형부 손에 들린 들꽃을 건네받았다. 형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언니의 가는 허리를 휘감고 그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아이…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연순은 얼굴을 붉히며 종복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찬하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한쪽에서는 만석이가 매형과 누나의 다정한 모습이 낯설고도 부끄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헤헤 웃었다. 정순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고 가만히 선생님의 얼굴을 훔쳐봤다.
그때, 들꽃에 선생님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이내 깊은숨을 몰아쉰 선생님이 드리워진 그늘을 감추듯 고개를 돌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정순이는 그것이 왜 다 져버린 꽃잎처럼 쓸쓸해 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