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향기로운 것들 뒤에 숨은 것

by 라라

제19장 향기로운 것들 뒤에 숨은 것



만석이가 과외를 한 첫날, 시간은 감정도 없이 흘렀다.

어느새 백 씨 영감댁에도 저녁상을 차릴 시간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밥을 푸면서 좀 전에 지나친 그 선생이 영 마음에 걸렸다. 훤칠한 그 청년은 장흥 바닥에서는 볼 수 없는 외모였다. 그를 맞닥뜨리고 느껴지는 이것은 어미로서 갖는 본능적인 위기감이었을까. 그 젊은 남자가 이 집에 드나들 것을 생각하니 뭐라 이름할 수 없는 께름칙함이 올라왔다.


“아야, 애징가니 퍼 담아라. 아조 저것은 아깐 줄을 몰라야.”


시어머니는 그 불안함을 감추려 애먼 며느리만 잡았다. 그때였다.


“사장님― 계세요―!”


대문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런 그 소리에 연순은 얼른 대문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가방을 멘 여자가 서 있었다. 허리선이 잡힌 꽃무늬 원피스, 풍성한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 진한 장밋빛 루주와 살굿빛 볼 터치가 여배우 같기도 한 게 참 낯설었다.


“누구시단가요?”


“아, 여그가… 백종복 사장님 댁 맞지라?”


여자는 살짝 비음이 섞인 소리로 묻고는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여기 있네. 사장님~”


여자는 마루에 앉아 있던 종복이를 보자 화색을 띠며 뛰어 들어갔다. 연순은 그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있었다.


“사장님이 아까 나한테 말한 거, 그거 갖고 왔어잉~”


여자는 애교 섞인 말투로 가방에서 상자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요곤 로숀, 요고는 분크림, 이것은 루주…”


스킨, 로션, 콜드크림, 분크림, 그리고 붉은 립스틱. 마루 위로 자꾸만 쌓여 가는 상자들… 시어머니는 밥을 차리다 말고 마루로 나왔다.


“아야, 이것이 다 뭣이다냐?”


상자들과 종복이를 번갈아 보던 시어머니가 물었다.


“여그가 아모레 한디 오늘 딱 만나브렀제. 연순이가 시집와서 맨 고생만 해서 근가 피부가 갈수록 까슬해져서… 근디 이것이 그라고 좋다고 합디다. 흐흐흐”


종복이는 여자가 쌓아놓은 상자들을 어린아이처럼 들어보았다.


“뭐, 얼굴에 줄 긋는다고 호박이 수박 된 다냐? 돈이 썩어나는구만. 그 돈이면 멀건 국에 고기 한 점 더 넣겄다이. 쯧쯧”


시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엄니는 무슨 말이 그라요? 연순이가 젤 이쁜 꽃인디! 뭔 호박이니, 수박이니 하는 것을 갖다 붙이요?”

각시 말만 나오면 감싸고도는 아들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


“니는 연순이 것만 갖다주라 했다냐? 죽고 살고 아들 키워놔 봤자 장가 가블믄 암 소용도 없어야?”


종복이는 머쓱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자네가 다 늙어서 화장품이 먼 필요하단가?”


백 씨 영감은 마누라에게 핀잔을 놓았다.


“아― 따, 여기 엄니는 성격이 아조 불이고마잉~ 엄니것은 여기 있지라.”


여자는 눈치 빠르게 살랑거리며 얼른 상자 꾸러미를 더 꺼냈다.


“저 짝에 있는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구만.”


노기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시어머니가 여자에게 말했다.


“아따― 요것이 저 짝 보다 훨씬 좋은 것이란께는 그라네. 한번 발라보쇼. 좋은가, 안 좋은가.”


여자는 붙임성 좋게 상자에서 화장품을 얼른 꺼내더니 시어머니 옆에 착 붙어 손등에 펴 발라주었다. 그제야 시어머니 얼굴에서 떨떠름함이 가셨다.


“사장님~ 그란디 색시는 어딨다요? 요고 발라브믄 허벌라게 이뻐져서 오늘 밤은 잠도 안 와블것인디?”

여자는 종복이를 향해 그의 부인을 찾았다.


“저 짝에 문 열어 준 사람이 내 색시 구만이라. 흐흐흣”


종복은 우두커니 서 있던 연순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연순이를 보고는 이들이 부부라기엔 영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놓치면 아까운 손님이기에 얼른 표정을 고쳐 지었다.


“와따메~ 나는 먼 아가씨가 저라고 이쁜가 했는디? 미스코리아네~ 사장님은 능력도 좋소잉! 요것을 발라 블믄 피부가 반질반질한 게 윤기가 나브러―”


여자는 화장품을 꺼내 연순이의 손등에도 펴 발라 주었다.


“색시는 참말로 남편 잘 만나브렀네이~ 이런 남자 드물어. 나는 장흥 바닥에서 첨 봐브러써. 호호홍”


종복은 밥 먹는 것도 잊고 여자가 내미는 상자를 연순이에게 안겼다. 그러나 연순은 지난날 언젠가 갖고 싶었던 좋은 향기의 그것들을 바라보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하이고― 저놈, 돈지랄한 것 보쇼. 연순이 말만 나오면 아조 눈이 삘게져서 돈 쓰고 싶어 안달이 났는가, 저 여시를 이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디. 집안이 망쪼 들게 생겼단께.”


얼결에 화장품을 받고서도 시어머니는 아들 부부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장가를 보내고 싶었어도 아들이 며느리한테 절절매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복이의 두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저녁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다.


“… 만석이 과외, 꼭… 해야 하는 거다요?”


화장품을 한 아름 받고도 기뻐하는 기색 없이 한쪽으로 치워놓은 연순이가 물었다.


“왜? 뭐시가 걸려?”


“뭔 과외까지 시켜감서 공부를 시키나 싶기도 하고…”


연순이는 말끝을 흐렸다.


“엄니가 또 니를 잡았냐? 처남이 공부 좀 한단디 그것 하나 못 해주믄 이 백종복이가 사람이것냐고!”


종복이는 요즘 들어 더욱 며느리를 고깝게 여기는 어머니임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연순이가 만석이 과외로 또 구박을 들었구나 싶었다.


“그… 그게 아니라.”


“연순아! 내가 엄니한티 한마디 할까? 이이? 말만 혀! 똑똑한 아그를 아껴뒀다가 뭣할 것이여? 타고난 놈 지 재주 펼치게 해 줘야제. 내가 든든한 빽이 돼줄 건 게 색시는 아무 걱정 하들 말어.”


“근데 선생님은… ”


“이 짝 저 짝에 다― 수소문해서 젤로 좋은 선생님 모시고 온 거여. 아까 물어 본께 만석이도 맘에 들어해쌌든만.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 게 하나도 걱정하지 말어잉. 알았지, 색시야?”


종복이는 연순이의 망설임을 가볍게 넘겼다. 그러고서 일 년을 내내 써도 다 못 쓸 화장품을 어서 열어 보라 재촉했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다 못 참고 이내 연순이를 안았다.


“… 연순아, 우리 연순이 닮은 애기… 얼른 갖자이.”


결국 그 상자들을 다 헤아려 보기도 전에 연순이가 먼저 헤아려질 수밖에 없던 밤이었다.


그 밤, 연순이는 한참을 뒤척였다. 앞으로 어떻게 찬하의 얼굴을 봐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답도 없는 고민이 끝없이 이어졌다. 찬하의 맑은 시선이 한 번씩 머무르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함께 무너졌던 자신을 다잡아야 했다. 내 자리가 이곳이라면 끝끝내 지켜야 했다.


똑같은 그 밤을 찬하 또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순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누가봐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격정에 사로잡힌 그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원받고 싶어 찾아간 그 집에서 찬하는 더욱더 죽을 것 같았다.


그 시장 상인들이 속닥이던 슬픈 소문 한가운데의 연순이를 자신이라면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종복이란 남자가 가녀린 그녀의 허리를 아무렇지 않게 휘감았을 때 그 안에 있던 그녀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면, 그건 그의 착각이었을까.

그 남자가 거친 손으로 건넨 들꽃을 품에 안은 그녀가 불행해 보였다면, 그건 그의 바람이었을까.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그 밤을 괴롭혔다.


‘왜, 내가 먼저 발견하지 못한 거야.’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노동의 흔적이 선명한 얼굴, 벗겨진 이마와 깊게 팬 주름, 고목처럼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손, 투박하고 느린 말투,

그리고 그 다리.

그녀가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선택했을까? 청초한 그녀가 희망을 다 잃은 얼굴로 그 남자에게 안겨있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찬하는 그녀의 떨림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에서 무너짐을 읽었다. 자신을 향한 당혹스러운 사랑을 본능처럼 느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정신이 아닌 듯 또 그녀를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