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보이지 않는 벌

by 라라

20. 보이지 않는 벌


찬하에겐 길고도 슬픈 밤이 종복에겐 새로운 하루를 위한 달콤한 밤이었다. 종복이의 삶은 찬하의 상실 위에서 더욱 빛났다.


“와따, 종복이는 날이 갈수록 인물이 훤해지네~”


오가는 사람마다 종복이더러 신수가 훤해졌다며 한마디씩 했다. 정말 결혼 이후로 종복이의 인물은 더욱 좋아졌다. 다리를 절어 그랬나, 그 생김이 못나서 그랬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던 그가 요즘엔 잘생겼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 살아가는 행복감 때문이었다.


이제 그 더운 여름도 다 갔다. 들판의 벼들은 익어갈 준비를 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선선했다. 종복이는 뭣이 그리 좋았는지 그날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절룩절룩 논에 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땅을 빌어먹고 사는 점례 아버지를 만났다.


“어이― 종복이! 얼굴이 갈수록 피는 고마잉. 연순이랑은 여전히 좋고?”


“아따, 성님! 그것을 말이라고 하요? 백종복이는 세상을 다 가졌구만.”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채우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아직 애기소식은 없고이?”


백 씨네 할멈이 손주 손주, 노래를 부르더란 소문은 이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지경이었다.


“애는 쓴디 쉽지가 않소. 나이가 좀 있어 그런가…”


종복은 언짢은 표정을 감추며 말끝을 흐렸다.


“…그랴. 근디 그 집서 처남이 과외받는다믄서?”


그는 조심스레 만석이의 과외에 대해 떠보았다. 찬하와 연순이를 강변에서 보고 소문을 냈던 아이, 점례를 통해 그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인제 공부한 지 한 달이나 됐제라. 처남이 워낙 똑똑해라. 내가 볼 땐 천재요! 나중에 한자리 크게 할 놈이단께요.”


만석이를 생각하니 또 자랑스러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이. 근디, 그 선생이 그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게 괜찮은거여?”


“뭣이 어쩐다요? 장인어른이 많이 안 좋으신께 어쩔 수 없지라”


“… 점례가 그 과외선생이랑 느그 각시랑 같이 있는 것을 봤다던디…”


점례 아버지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아… 그 선생이 처제 야학 선생이어라. 처남이랑 처제를 여태껏 많이 챙겨줬답디다. 하하…”


종복은 속없는 사람처럼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연순이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 내렸을까.


“느그 각시가 하도 이쁜께 그려. 색시 잘 관수혀~”


점례 아버지는 농담처럼 툭, 던졌다. 그 말은 종복이의 마음에 긴 파동을 일으켰다.


한편, 백 씨네 할멈은 아들을 장가보내고 그다음 숙제는 손자라는 듯, 날마다 불공드리며 치성을 다 했다. 하지만 고대하던 손주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도 이웃 마을 순자네 할머니가 종복이 친구, 상길이네 집에서 넷째 아들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속이 다 뒤집혔다.


“아조, 며느리 하나 잘못 들여서 백씨 가문 대가 끊기게 생겼어야? 어째 놈들은 덜컥덜컥 잘만 들어서는 아그가 소식이 없다냐? 에잇!”


구박한다고 들어설까.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할멈은 대문을 벌컥 차고 집을 나서며 오늘은 용한 무당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네 회관에서 천관 보살이 그렇게 용하다는 말을 들었다. 천관산이 참 신령스러운 산인데 그 산의 기운을 받아 그렇다던가, 영험하기로는 전라도 제일이라고 할멈들이 떠들어댔다.


백 씨 할멈은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들어갔다. 버스는 산 아래 이르러 멈췄다. 앞으로는 짙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그 바다를 천관산이 굽어살피고 있었다.


“저 짝으로 가믄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을 것이오. 그 안쪽으로 좀만 더 가면 집 한 채가 있는디, 그곳이 천관 보살 댁이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한참을 또 걸었다. 그 길 끝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길목을 지키듯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할멈의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구불구불한 가지들은 서로 얽어가며 자라난 모습이 한눈에 보아도 보통 나무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울퉁불퉁한 껍질이 산신령의 손등처럼 느껴졌다. 그때, 할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던 바람 한 점이 가지마다 걸린 오방색 천을 나부끼게 했다.


나무 아래엔 그곳을 오간 이들의 소원이 담긴 돌무더기가 쌓여있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안쪽으로 신대가 꽂힌 집 한 채가 보였다. 뭣에 홀린 사람처럼 그 마당에 들어서니 진한 향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방안에는 남색 치마와 붉은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흔드는 방울 소리가 짤랑거리며 새어 나왔다.


“워매― 워매― 여기 대가 끊기게 생겼다고 할멈 하나가 왔네에. 조상들 곡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모든 것을 꿰고 있는 듯한 무당은 곧 타령 같기도 주문 같기도 한 말을 중얼거렸다. 시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져 얼른 뛰어 들어갔다. 엎드려 절하고 비나이다 손을 비비며 기도드렸다. 한참 방울을 흔들던 무당이 쌀을 한 줌 움켜쥐더니 상 위로 뿌렸다.


“할멈! 젊어서 지은 죄가 커!”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는 무당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움찔한 백 씨 할멈은 더 열심히 빌었다. 눈을 뒤집어 까고 방울을 흔들던 천관 보살이 신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할멈을 노려봤다.


“시방 애기가 하나 있구만!”


“…뭐라고라? 며느리가 아기를 가졌다, 그 말씀이요?”


“신령님이 말하시는데 되물으면 노하신다! 신령님이 말씀하시네― 애기가 하나 있다고!”


시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좀 전의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녀의 쌈지 주머니에서 복채가 두 배나, 세배나 나온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굽이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가에 핀 코스모스마저도 복스러웠다. 아침엔 그렇게 성이 났던 시어머니가 그날 오후엔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들어왔다. 무슨 일로 장에까지 들렸는지 배며 사과며 감이며 모두 반질반질 이쁜 놈들로만 바리바리 사 들고 왔다.


“아가, 니 줄라고 사 왔다. 이쁜 놈으로만 골라서 먹어라이”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 났던 그 시어머니가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태도가 바뀌니 연순이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가, 너는 앞으로 몸조심해야 된께 부엌엔 들어오지 말고 누워 있어라이. 알았지야?”


평소 아들이 연순이 손에 물도 못 묻히게 한다고 가자미눈을 떴던 시어머니였다. 갑자기 며느리에게 부엌 출입도 금하니 연순이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시어머니는 그 굽은 허리로 소불고기며 나물이며 된장국까지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렇게 올린 밥상을 둘러앉아 먹는 그날 저녁, 시어머니는 기분이 좋아 연순이에게 소불고기를 밀어주었다.


“아따, 엄니가 뭔 일이요? 진작에 우리 연순이를 이렇게 챙겨줬으면 얼매나 좋아? 흐흣”


종복이도 어머니의 달라진 태도에 놀란 눈치였다.


“내가 오늘 전라도에서 제일로 용한 천관 무당을 찾아갔단 마다. 근디 그 양반이 우리 집 사정을 쫙 꿰고 있더라고. 그라고서는 애기가 하나 있다더라!”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띤 시어머니가 신이나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순이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된장국의 김이 서늘한 땀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자꾸 식모살이 기억이 떠올랐을까. 왜 자꾸 지워버린 아기가 생각났을까. 입안에서 쌀알의 감각마저 다 느껴져 더 씹지 못했다.


“아― 따, 엄니는 뭔 미신을 그라고 믿고 그라요? 연순이한티 자꾸 부담 주지 말란께라!”


종복이는 연순이에게 행여나 부담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당신이 그렇게 설레발을 치니 들어설 애도 안 들어서겄네. 쯧쯧…”


백 씨 영감도 나서서 할멈을 면박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제. 연순아, 밥 더 묵으라이.”


시어머니는 연순이의 그릇에 자꾸만 밥을 더 얹어 주었다. 따뜻한 밥상 위로 시어머니는 연신 웃었고 연순이는 얹힐 듯한 그 밥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 밤, 연순이는 저녁에 먹은 밥이 얹혔는지 속이 불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또 뒤척였다. 그러자 종복이의 거칠고 따가운 손이 연순이 배로 감겨 들어왔다.


“이 뱃속에 우리 연순이 닮은 아기가 언능 왔으믄 좋겄네이.”


또 서서히 젖어 드는 그. 하나씩 벗겨지면서도 연순이는 용한 무당이 시어머니에게 했다는 그 말이 지난날을 벌하는 것 같아 마음에도 체기가 내려앉은 듯 답답했다.


그 밤에 종복이도 잠이 오지 않았었다. 점례 아버지가 말했던 과외선생님은 남자가 봐도 멋진 청년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말투도 부드럽고 배운 티가 났다. 가진 거라곤 아내에 대한 순정밖에 없는 자신과는 애초에 급이 다르게 달랐다. 그런 남자가 연순이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가 연순이와 같이 있었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 믿었지만 그 남자 옆에 선 연순이를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누가 내 것을 뺏기라도 할까 저도 모르게 어금니가 꽉 물렸다.


종복이는 연순이가 달아날까 봐 결혼 날짜를 잡고도 수많은 날을 불안에 떨었다. 결혼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점례 아버지의 그 말은 다시 종복이를 불안하게 했다. 저와 연순이 사이에 아이가 생겨야만 끝까지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거라는 감정이 본능처럼 올라왔다. 그래서 그 밤을 뒤척이는 연순이를 참지 않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렇게 그들의 불행하고도 불안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