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남겨진 꽃핀 하나

by 라라

제16장 남겨진 꽃핀 하나


그동안 그렇게 비 소식이 없어 농가의 애를 태우더니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그 비로 가물었던 탐진강은 불어났고 그것은 목마른 땅의 목을 축이며 애타는 사람들의 가슴도 어루만졌다.


정순이는 또 비를 핑계로 며칠째 야학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미자는 애가 탔다. 정순이와 함께 야학을 나가면서 선생님들의 얼굴만 재밌는 게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를 못 다닌 정순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던 친구 미자는 정순이가 다시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알아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꽃이 피는 것도 좋았다. 늘 집에 얽매여 사는 친구가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게 좋았다.


“미자야, 오늘도 정순이는 안 온 거니?”


찬하 선생님도 며칠째 나오지 않는 정순이를 걱정했다. 차마 정순이와 아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지 못했지만 속 편해 보이는 선생님이 얄미웠다. 미자는 고민하다가 연순이 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언니―”


집안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미자야! 니가 웬일이냐?”


언니는 무슨 심란한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예쁜 얼굴이 그늘지고 낯빛이 창백했다.


“언니, 형부는 안 계시제? 언니가 어찌케 사나 궁금해서 왔네. 할 말이 있기도 하고…”


그간 남몰래 마음의 지옥을 걷고 있던 연순이는 자매 같은 미자를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곧 방으로 들이고 부엌에서 말캉하게 잘 익어 달콤한 복숭아를 깎아 내왔다. 정순이의 친구라기엔 정순이와는 다른 성격의 미자. 평소에도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아이가 할 말을 고르는 모습이 낯설었다.


“언니, 요즘 정순이가 야학에 안 나오네.”


얼마 전, 찬하에게 들었던 정순이 이야기를 미자가 또 하고 있었다. 정순이가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그동안 연순이 마음의 혼란 가운데에는 할 말을 참는 듯한 정순이의 표정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정순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여?”


“거기 다니는 가시네들이랑 싸움이 있어가꼬…”


“정순이가야? 그것이 그럴 애기가 아닌디…”


순하디순한 정순이는 남의 것을 욕심부려본 적이 없었고 자기주장을 내세운 적도 없었다. 형제들 간에 늘 먼저 양보하고서도 괜찮았던 정순이가 싸움을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가시네들이 정순이를 먼저 건들었제… 언니랑 찬하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정순이한테 뭐라고 해싸서… 내가 애들한테는 그런 거 아니라고 했는디…”


순간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볼을 타고 올라왔다. 흔들리는 눈빛의 정순이가 시답잖은 말만 늘어뜨리고 돌아간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숨기고 싶던 비밀을 들켜버린 불안과 수치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선생님이랑 그럴 사이는 아니겄지만 그것들이 질투해 싸니까 소문을 만들어븐 거여. 정순이가 성질이 나서 그랬는가, 안 나와 블드라고… 언니가 정순이한테 말 좀 잘해주면 안 되겄는가? 그것이 인제사 밤에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나 진짜로 좋았거든. 언니, 나는 정순이가 짠해.”


아슬아슬했던 그와의 만남, 친구라고 속였던 시간 속에서 연순이는 수없이 설렜고, 흔들렸고, 행복했다.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던 연순이에겐 그를 만나는 시간이 구원이었다.


그러나 강변에서 그 선을 넘어버리고서 더욱 선명해진 관계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연순이는 갈망과 거짓말과 죄책감으로 뒤섞인 소용돌이 속에서 눈을 꾹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런데 미자에게서 정순이가 당한 그 일을 듣는 순간 더는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생긴 여유 한 줌으로 그간 못했던 공부를 시작한 동생에게서 다시 배움을 빼앗아 가 버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와 끝을 맺어야 한다는 분명한 진실을 마주한 것이다.


한편, 찬하 또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또 그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욕망을 드러낸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거닐면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녀의 웃음을 보면서, 끓어오르는 격정을 눌러왔던 숱한 시간이 지나갔다. 한번 터져버린 봇물은 걷잡을 수 없는 홍수가 되어 그의 마음을 뒤덮어 버렸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이제는 무조건 그녀가 내 것이어야 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밀치고 떠나가서는 또 숨어버린 그녀였지만 그가 읽은 그녀의 눈빛이 맞다면, 혹 그게 아니라 해도… 괜찮았다.


내 것이 될 때까지 이곳에 남을 작정이었다.


그날은 왠지 예감이 좋았다.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도 매만졌다. 그리고 그동안 갈팡질팡하며 미뤄두었던 휴학계를 냈다. 그 길에 있던 잡화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던 꽃핀도 하나 샀다. 그 꽃핀이라면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칼에 잘 어울릴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 서툴렀던 그날을 만회해 볼 작정이었다.


미자가 왔다 간 후, 복잡한 마음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연순이는 급하게 장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오늘은 만나야 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항상 만나던 그 골목에서 또 서 있는 사람, 그녀를 보더니 애가 탔던 며칠은 잊어버린 듯 언제나처럼 웃는 찬하. 그날보다 더 가라앉은 얼굴로 애써 웃던 연순이는 고개를 들어 그런 그를 오래 쳐다보았다. 두 눈 안에 오래오래 담고 싶다고 생각하며.


관계의 끝과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이라는 서로 다른 두 마음이 탐진 강변을 향해 걸어갔다. 그간 내린 비로 불어난 강은 흙탕물로 뒤섞여 세차게 흘러갔다.


“연순 씨, 그날은 미안했어요.”


“…….”


“다시 만나면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 연순 씨를 사랑해요.”


찬하는 선선한 고백과 함께 꽃핀을 연순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래 연습한 듯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의 말이 가슴을 찌르며 스며들었다.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에 그녀 또한 공명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해한 그 앞에서 다시 한번 무너지고 싶은 자신을 가까스로 참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연순이는 마침표의 그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찬하 씨, 저는 그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나를…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왜…”


연순이 고개를 떨궜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가정이 있어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이미 결혼했어요. 미안해요, 찬하 씨.”


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들은 말을 부인하듯 숨을 멈춘 채 연순을 바라봤다.


“그런 말 말아요. 연순 씨,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내가 미워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잘할게요.

다 고칠게요. 연순 씨! 제발… 나를 밀어내지 말아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애써 눌러온 감정이 터져 나오는 순간 연순은 등을 돌려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찬하는 무너지듯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온기가 그대로 가슴에 와닿았다.


이 모든 게 꿈이길.

거짓이길.

모르는 언어이길.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싶은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연순이의 머리칼을 적셨고, 그녀는 그저 조용히 안겨있었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달았다. 그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래서 더 아팠다.


연순은 흐느끼는 찬하의 등을 조심스레 다독였다. 천천히 그의 품에서 자신을 떼어냈다. 그리고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이 한 단어 한 단어 또렷이 발음하여 뱉어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찬하 씨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요.”


두 눈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떨어졌다.

찬하는 그제야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연순이는 미안하다는 마지막 말로 모든 감정의 마침표를 찍고는 조용히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찬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주룩― 주룩― 하늘마저 그들을 슬퍼하는 걸까. 눈물을 쏟아냈다.

그 비는 이별이었고 속죄였다.

장대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피해 달려가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 연순이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있었다. 그녀는 비를 피하듯 미장원으로 들어갔다.


“지금이 딱 이쁜디 진짜로 단발로 자를라고야? 종복이가 알믄 나한테 막 뭐라 할 것인디.”


어느덧 허리께까지 자라난 연순이의 긴 머리카락 끝에는 그의 더운 숨결과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식지 못한 사랑의 열기가 되어 미련처럼 남아 있었다.

연순이는 아쉬움도 없는 사람처럼 머리를 잘랐다.

너무나 달았기에 더는 안 될 그 사랑을 싹둑― 잘라냈다.


단발이 된 연순이는 집에 오자마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저녁상을 차렸다.

겉절이를 무치고 오이냉국을 만들었다.

무를 썰어 종복이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을 지졌다.

돼지고기에 고추장 양념을 비벼 제육볶음도 만들었다.

갈치를 굽고 다슬기 한 줌을 넣은 시원한 된장국도 끓였다.

자꾸만, 자꾸만 더 올릴 자리도 없는 밥상에 반찬들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애써 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서, 이제야 내 자리를 찾은 사람처럼.

쓸모를 잃은 그 꽃핀은 연순이의 작은 화장대 서랍 한쪽에 있었다.

마치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

그건, 짧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던 사랑의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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