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시든 꽃에게 바치는 꽃다발
한 편, 백 씨네 할멈은 젊디젊은 며느리가 아들과 날이면 날마다 붙어 있는데도 손주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애가 탔다.
“새아가, 너 아직도 아무 소식 없냐?”
“무슨…?”
“이 답답한 것. 느그 시아버지 손주, 손주, 그렇게 노래를 해 싼데 아직도 소식이 없응께 하는 말 아니냐!”
연순이는 가슴이 턱 내려앉았다.
“…아직이요. ”
결혼한 지 반년, 아이 소식이 없어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원치 않은 임신, 그리고 지워야 했던 아이. 임신중절 수술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의료 기술은 허술했고 불임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느그들은 아주 날마다 붙어 있더만 도대체 밤마다 뭘 하고 있는 것이여?”
매서운 말에 연순이는 고개를 떨궜다.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한 줄은 아는 갑다. 종복이가 백 씨 집안에 삼대독자인 것은 알고 있지야?”
“네…”
“이 한약,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챙겨 무그라이. 절에서 원광 법사님한테 부적 하나 써왔응께 그거 비게 밑에다가 항시 놔두고 자고. 알았지야?”
“네에…”
연순이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정순이는 언니 집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째 야학에 못나가고 있던 정순이는 오늘은 언니를 만나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 집 마당을 지나는데 문 너머로 매서운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절로 걸음이 멈췄다.
“…백 씨 집안에 삼대독자인디… 밤마다 뭘 하고 있는 것이여?”
새어 나온 그 말이 언니를 의심하고 미워했던 정순이에게로 와서 송곳처럼 찔렀다. 곧 안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성난 얼굴의 시어머니가 나왔다. 그녀는 사돈처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온 언니의 눈가엔 물기가 어려있었다.
“언니… 나 왔네. ”
“아, 그래 정순아, 무슨 일이다냐?”
언니는 정순이를 보자 얼른 기색을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정순이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 축 늘어진 어깨, 웃음마저 허기진 얼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다정했던 언니가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을 왜 몰랐을까. 묻고 싶었던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꺼낼 수가 없었다.
언니에게 남은 눈물자국이 모든 대답이 되어버렸다.
“별일은 아니고… 언니 생각나서 왔제. 날도 더운디 잘 지내는가 싶어서…”
“내가 성가실 것이 뭐가 있겄냐. 아주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제. 아부지 건강은 좀 어떠신다냐? ”
더욱 수척해진 언니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지만 그럴수록 정순이의 마음은 저릿했다.
“아부지, 좀 나아지신 것 같어. 엄니가 몸에 좋은 거 챙겨 드려서 그런가 기력도 좋아지시고…”
“다행이다야. 너, 야학은 잘 댕기고 있지?”
“어… 그라믄, 잘 댕기고 있지…”
그 순간, 연순이는 동생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듯한 표정에 마음이 서걱거렸다. 더 물어볼까 하다가 본인 속이 복잡해 말문을 닫았다.
정순이는 시답잖은 말 몇 마디만 남기고 언니 집을 나섰다. 언니를 생각할수록 떫은맛이 도는 게 꼭 덜 익은 감 같았다.
‘예쁜 언니를 모셔갔으면 행복하게 해 줘야제. 도대체 형부, 그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거여? 결혼만 하면 장땡이다, 이거여?’
언니는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망울이었다. 종복 아저씨에게 주기엔 너무나 곱고 예뻤던 언니. 그 언니가 이젠 다 시든 꽃 같다. 잠시라도 미워했던 내가 언니를 더 시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정순이마저 가고 혼자 남게 된 연순이는 마음이 허했다. 어지러워진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요즘 시어머니의 손주 타령은 점점 더 노골적이었다. 그럴수록 연순의 마음에는 근심이 쌓여갔다. 이 집에 시집와서 해야 하는 일 중 첫 번째는 ‘출산’이었다. 종복이는 첫 아이를 보기에도 이미 나이가 많았고 시부모님 또한 죽기 전에는 꼭 손주를 보고 싶어 했다. 삼대독자인 이 집에서 대를 잇지 못한다면 연순이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영영 아기가 안 생기면… 어떡하지?’
과거. 혼자 감당해야 했던 열아홉 그날의 기억. 아기를 지우고 몸은 회복했지만 상처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기가 들어서지 않은 지금이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답답했다. 장을 나서면 해결될까. 무심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나면 괜찮아질까, 그러다가 습관처럼 떠오르고만 얼굴.
그가,
보고 싶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더니 역시나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늘 우연처럼 만나던 그들은 좁혀지지 않은 거리를 두고 걸었지만 강변에 다다르면 어느새 나란히 걷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연순이의 얼굴엔 평소보다 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었다. 찬하는 실없는 농담으로 웃음을 그 얼굴 안에 가두고 싶었지만 웃음은 이어지다 끊기고, 또 끊겼다. 가녀린 어깨 위로 드리워진 삶의 무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찬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연순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요즘 정순이도 야학에 안 나와서… 연순 씨도 걱정됐어요.”
오늘 낮에, 집에 왔던 정순이가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던 그 눈빛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공부를 그렇게 하고 싶던 아이가 왜…’
정순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더 복잡하게 뒤엉켰다.
“찬하 씨, 저… 이만 가볼게요. ”
힘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찬하는 설명할 수 없는 조급함에 휩싸였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본능처럼 뻗은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단숨에 끌어안았다.
“…찬하 씨…?”
연순이는 놀란 눈으로 그의 품에 묻혔다. 몸이 떨려왔다. 들려오는 쿵, 쿵— 심장 소리.
“미안해요. 연순 씨가 그런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까…”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연순 씨가 슬픈 거, 더는 못 보겠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엔 그동안 숨겨왔던 갈망과 떨림으로 가득했다. 찬하는 그의 얼굴을 연순의 목덜미 깊숙이 묻었다. 희미한 복숭앗빛 향기. 그 향기에 무너질 뻔한 순간이 몇 번이었던가. 결국 오늘에서야 무너지고 말았다.
순간,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안기고 싶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이름을 순수하게 알려준 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온기 속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안 돼요. 찬하 씨… 이젠… 그만… 제발!”
연순은 애써 정신을 붙잡고 그를 밀어냈다. 그의 품을 벗어난 순간 저릿하게 스며 들었던 온기까지 사라졌다. 불안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치던 연순이는 도망치듯 달렸다.
찬하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녀를 타오르는 갈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갖고 싶었다,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연순은 쉬지 않고 달렸다. 지금의 이 심장 소리가 찬하 때문인지 내달렸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득해져 오는 정신을 붙잡고서야 겨우 집에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는 종복이가 꽃다발을 들고 평상에 앉아 있었다. 여름마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망초와 참나리꽃.
“연순아, 신랑보고 자파서 이렇게 뛰어온 거여? 오늘 논에 나갔다가, 꽃이 참 이쁘드라.”
“…….”
“물론 내 색시가 훨씬 더 이쁘지만. 인제는 내가 진짜로 미쳤는갑서야. 어딜 가도 연순이 니 생각만 난단 마다. 들에 핀 꽃만 봐도 꼭 니 같고…”
종복이는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연순이를 바라보다 꼭 껴안았다.
진한 땀 냄새, 풀냄새, 흙냄새. 종복이의 품은 따뜻했다. 그의 투박한 말투도, 손에 들린 들꽃들도…
참 순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연순이는 더없이 쓸쓸했다.
용서받지 못할 마음 때문에 그의 다정함이 죄 같았다.
그럼에도 더욱더 깊숙이 감겨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그 꽃과 함께 묵묵히 안겨있었다.
찬하가 주고 싶어 했던 그 꽃은 닿지 못했고
종복이가 주었던 그 꽃은 사랑받지 못했다.
*개망초 꽃말 : 순수한 사랑 / *참나리 꽃말 : 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