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른의 얼굴

by 라라

제23 장 어른의 얼굴


어떻게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할까? 그렇게나 살뜰하게 며느리를 챙겼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또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다.


“종복이 그놈이 그렇― 게 중매를 서 달라고 했어도 끝까지 버텼어야 했었는디… 쯧쯧”


그 말만 듣고 보면 꼭 종복이가 팔려 온 신랑 같았다. 며느리가 밥을 풀 때도, 빨래를 갤 때도, 방을 닦을 때도 다 들리도록 해대는 넋두리는 끝이 없었다. 그 때문에 연순이는 날이 갈수록 볼품없이 말라 갔고 그 낯빛은 더욱 거칠어졌다.


한편, 또다시 찬하와 얽혀버린 그날 이후로 연순이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그 선이 자각할 새도 없이 무너져버렸다. 그와 엉켜버렸던 시간은 온몸의 감각으로 각인되었다. 찬하를 대면할 때마다 외면하고 싶은 그날의 감각이 불처럼 일었다. 그래서 연순은 과외를 이유로 날마다 찾는 그 앞에서 더 무심해야 했고 더 차가워야 했다.


찬하에겐 그날 그 순간이 벌이었고 끝내 놓을 수 없던 간절함이었다. 그는 서로 어긋나는 시선들 사이에서 그날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면을 써버린 그녀에게선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겐 평온하고도 잔혹한 날들이었다.


마당엔 단풍이 벌겋게 물들고 잔디도 지난날의 푸르름을 잃었다. 하늘은 유난히도 높고 시퍼렜으며 마당의 감은 눈이 부시도록 쏟아지는 햇살에 알맞게 익어갔다. 들일이 바빠진 농촌이기에 백 씨 부자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나갔다. 손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시어미는 오늘은 불공을 드리러 보림사에 갔다. 여느 날과 같이 만석이와 찬하는 작은 방에서 공부를 했고 연순이는 부엌에서 감자전을 부치고 있었다.


한 장의 그림처럼 평화로운 가을이었다. 갑자기 열린 대문은 그 모든 평화로움을 깨고 들어왔다.


“마… 만석아! 만석아!”


용남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용남이는 만석이 이름만 연거푸 불러댔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소란에 놀란 연순이 마당으로 나갔다. 만석이와 찬하도 마루로 나왔다.


“만석아! 차… 창석이 형아가 지금 저 짝 공사장에서 쓰러져 있어야!”


울상이 된 용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형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가족들 몰래 학교를 그만뒀다. 돈 번다고 공사장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은 정순이 누나만 아는 비밀이었지만 사실은 만석이도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같이 나간 형이 쓰러져 있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석이가 왜 공사장에서 쓰러져 있어야?”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가, 생각하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연순은 갑자기 멍해졌다. 만석이는 초조했다. 누나의 물음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던 만석이는 곧 용남이를 따라 달려 나갔다. 뒤이어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연순이와 찬하도 따라 나갔다.


용남이가 이끄는 곳으로 갔을 때 그곳엔 창석이가 공사장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멀리에서도 한눈에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어 젖어있는 붉은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인부들 몇몇은 보고만 있을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형아! 이게 뭔 일이여!”


처참한 몰골의 형을 본 만석이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듣는 이의 가슴을 처절하게 후벼 팠다.


“창석아, 니… 니가 왜 여기 있는 것이여!”


연순이 눈앞에 누워있는 창석이는 영락없는 노가다꾼이었다. 지난봄, 창석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며 걱정하던 정순이가 스쳐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더는 말이 없었기에 안심해 버렸던 자신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뭣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니가, 니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창석이는 비밀을 들킨 마음이 다리보다 더 아팠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아이가 이렇게 다쳤는데 모두 뭣들하고 있는 겁니까?”


찬하가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지가 잘못해서 다친 것을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여?”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이렇게 다쳤으면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연한 것을 모르는 체하는 그들의 비정함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 틈을 가르며 작업반장이란 자가 삿대질하며 나왔다.


“병원비는 누가 대주고? 그 짝이 내줄 거여? 병원 한번 가블믄 집 하나는 망해브는 거 모른 단가?”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노동자는 있어도 그의 인권은 없었다. 소년 노동자도 버젓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불법이었고 그 불법은 보호받지 못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처리는 언감생심이었고 병원에 간다는 것은 곧 그 집이 망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치료비가 비쌌다. 머리가 깨져도 된장이나 발라 버텨야 했고, 그렇게 참고 견딘 상처로 평생을 불구로 사는 이도 흔했다.


“사람이 먼저 아닙니까! 이렇게 어린애를 부려 먹는 게 말이나 됩니까!”


“지가 일 좀 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싸니 써준 거제. 지가 잘못해서 다쳤는디 시방 누구 탓을 하는 거여? 보니께 얼마 다치지도 않았구만. 그냥 집에서 좀 쉬다가 뼈 맞추는 집에 가면 다 나을 것인디 저 난리를 해쌌네!”


작업반장은 적반하장격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내질렀다.


“지금 다친 애를 앞에 두고 어른이 돼서 그게 할 말입니까?”


세상의 떼가 채 묻지 않아서일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울컥, 터져 나왔다. 그 분노는 그 누구도 그를 말릴 틈 없이 찬하를 험상궂은 인상의 작업반장에게 달려들도록 내몰았다. 그러나 작업반장은 평생을 거친 노동판에서 굴러먹으며 살아남은 자였다. 그 남자를 샌님 티를 벗지 못한 하얀 청년이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다.


찬하는 주먹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낙엽처럼 나뒹굴며 쓰러졌다.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헝클어졌고 늘 부드럽게 웃음 짓던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왔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무자비한 발길질이 쏟아졌다. 연순이에겐 이 모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투성이가 된 동생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트럭 하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사장 앞에 섰다. 트럭에서는 종복이와 정순이가 내렸다. 이미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인지 다문 종복이의 입매는 비장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창석이와 울고 있는 연순이, 만석이를 보았다. 그리고 작업반장과 엉겨 붙어 있는 선생, 찬하도 보았다. 곧 이 일이 어떻게 굴러간 것인지 모든 상황을 단숨에 꿰뚫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그가 절뚝대며 이들 중심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의 입이 순식간에 닫혔다.


“여그 반장이 못 쓰겄네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평소 그가 쌀집과 함께 운영하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받아본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다. 백 씨네의 논을 빌어먹고 사는 집도 한 둘이 아니었다. 한참 찬하와 엉켜 싸우던 작업반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뜩이는 눈으로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곧 백종복을 알아본 그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 종복이가 여그는 뭔 일이여?”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백 씨네가 현장에 공급하는 일꾼들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인자 여그는 우리 쪽 사람들 안 보냅니다이. 그라고 나는 당장 경찰서장이고 군수고 다 만날 건게 그리 아슈.”


종복이는 장흥에서 권세깨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로터리 클럽의 회원이었다. 로터리 클럽은 지역 유지들과 인사들이 결합하여 운영되었던 봉사단체였다. 그들만의 인맥은 끈끈했고 때로는 법보다 더 강했다.


일꾼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며 자기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종복이었지만 그가 한번 마음먹으면 무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 한마디라면 당장 생계가 끊길 수 있다는 힘의 역학관계를 그들은 너무나 잘 아는 어른들이었다.


“저 애가 도대체 뭐라고 백사장이 이리 나선단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반장이 따져 물었다.


“내 처남이여! 내 처남을 이렇게 만든 것을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건께 두고 보라고.”


주변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다. 평소 백종복이가 그 아내를 얼마나 아끼던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창석이가 그의 처남인 줄 알았더라면 그리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으름장을 놓은 종복이는 울고 있던 연순이와 그 앞의 창석이에게 다가갔다.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지금 여기서 뭣 하는 것이여? 누나 눈에 눈물 나믄 내가 가만 안 있을건디.”


종복이는 창석이를 부축해 트럭에 태웠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들의 자리로 사라졌다. 연순이는 결단력 있는 종복에게 안도감과 죄책감이 교차했다. 정순이는 놀랐을 언니를 일으켜 달랬다. 만석이는 오늘도 매형에게서 든든함을 느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찬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그동안 업신여겼던 종복의 진짜 어른다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