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한번은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포르투갈에서 온 20대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4시간이나 출발이 지연되어서 대화를 나누며 지루함을 달랬다. 친구의 이름은 프란시스카였다.
프란시스카>>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를 여행했어요?
붑커>> 우리는 나폴리에 있다가 왔어요.
프란시스카>> 나폴리?! 와 대단하네요. 저는 나폴리는 겁나서 못 가겠어요.
나>> 아 맞아요. 혼자 여행하기는 좀 험한 곳이라..
붑커>> 에이, 아니예요.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괜찮다는 남편의 말에 프란시스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프란시스카>> 하하하, 모로코 사람이라면야 문제 없지요.
그녀의 말에 우리 모두 빵 웃음이 터졌다. 그 말이 맞았다.
모로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그 성정이 가차없기로 잘 알려져 있다. 모로코의 관광지들은 치안이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음지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결코 드물지 않다. 모로코 남자들에겐, 부잣집에서 곱게만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면, 태어나서 한번 이상은 크고 작은 절도나 폭력, 또는 그 이상의 범죄에 노출되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만큼 위험 상황에 대비해서 언제든지 싸울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모로코 출신이라고 하면 웬만한 나폴리 범죄자들도 오히려 피해가는 기현상이 나타날 만도 한 것이다.
나도 프란시스카처럼 몇년 전에 혼자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나폴리에 머물 것은 엄두도 못내고 소렌토로 도망치듯 떠났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과 함께라서, 더군다나 남편이 모로코 사람이라서 좀 더 마음 놓고 나폴리를 관광할 수 있었다.
나폴리에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는 중심가와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데다 근처에 인기 있는 피자집도 있었다. 숙소 자체도 깨끗하고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 올 일이 있다면 같은 곳에 묵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의 대문과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손 모양의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훌쩍 넘어 도착한 우리는 방에 짐을 풀고는 곧장 피자집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텅빈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드디어 고대하던 나폴리 피자를 맛 볼 차례이다! 엄청 허기진 상태에서 눈앞에 놓인 피자를 보자 침이 꼴깍 넘어가고 위장이 '얼쑤 나폴리 피자다'하며 신나서 춤을 췄다.
마르게리따. 피자의 커다란 사이즈를 보여주기 위해 손과 비교하여 사진를 찍었다. 아래의 접시를 넘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거대한 피자였다.
안에 재료를 넣어 반달 모양으로 튀겨 낸 피자, 칼조네.
피자를 한입 베어물자 치즈가 주욱 흘러내린다. 정확히 말하면 치즈 뿐 아니라 도우도 같이 흐른다. 도우가 어찌나 얇고 부드러운지, 평소에 먹던 단단하고 두터운 도우와는 전혀 달랐다. 이래서 피자 하면 나폴리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토핑도 토마토와 치즈와 바질만이 올라간 단순한 피자일진데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우린 피자 한판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칼조네 피자 역시 맛있었지만, 칼조네의 바삭한 도우보다 나는 일반 피자의 입에서 녹는 도우의 맛에 반해버렸다.
"만약 나폴리에 산다면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모두 피자만 먹을래!"
매우 배가 고팠던 상태임에도 양이 너무 많아서 우린 남은 칼조네 절반을 포장하여 나왔다. 피자 두판을 시켜 배가 터지게 먹고도 20유로도 안되었다. 피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폴리에 와야하는 이유다.
피자의 달인이 피자 만드는 법 직관하기! 화려하고 절제된 손놀림으로 한판 완성에 1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이탈리아에 온 이유 중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에스프레소!
식사를 마치고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에스프레소 한잔에다가 다른 하나는 조금 특별한 커피를 시켜보았다. 이름은 카페 논노. 할아버지(논노) 커피라는 뜻이다. 나이가 지긋하고 인상 좋은 카페 주인분이 달달하고 시원한 크림이 올라간 커피라고 알려주셨다.
카페 논노는 혼자 다 먹기엔 너무 달았지만 남편과 나눠 먹으니 먹을만 했다. 약간 기름기가 있는 밀크커피 크림이 초코 시럽과 섞여서, 커피보다는 디저트에 가깝고 맛도 있었다.
에스프레소는 말이 필요 없었다.
"진짜 에스프레소다!" 남편은 눈을 감고 음미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한입 마셨다. 아주 진한데도 희한하게 혀에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고 인상이 찌푸려지지 않았다. 설탕이 전혀 섞이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쌉쌀하면서 동시에 달았다. 이날 이후로 남편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한두 티스푼 넣어먹던 습관을 버렸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그 자체로 완벽해서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순수 커피의 맛만으로 충분했다.
피자와 커피에 반하여 우리는 나폴리에 도착한지 서너시간 만에 사랑에 빠졌다.
카페 논노(좌), 에스프레소(우)
다음 날에는 나폴리의 중심가를 걸어다녔다.조금은 낡고 덜 정돈된 느낌의 골목길과 건물들이 정겹다. 잘 관리된 관광지라기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의 상인들이 큰소리로 활기차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오래된 스쿠터와 골목을 간신히 지날만한 크기의 수레가 왁자하게 행인들을 스쳐 지나가는. 나폴리가 좋다.
나폴리는 로마나 피렌체에 비해 물가가 싼 것도 매력 중에 하나이다. 시장은 그중에서도 더 저렴하다. 그릇이 넘치게 담아주는 구운 닭고기는 반마리에 푸짐한 감자까지 더해서 6유로이고 통통한 바게트 샌드위치가 2~3유로이다.
노상 식사는 왠지 모르게 더 맛있다.
나폴리 사람들은 정이 넘친다. 걸어가다 눈만 슬쩍 마주쳐도 활짝 웃어준다. 처음 본 사람과도 인사를 주고 받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개구진 눈동자는 언제라도 농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에게는 뿜어져 나오는 남다른 에너지가 있다.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는 수염을 씰룩이며 콧노래를 분다. 벤치에 앉아 통화를 하는 젊은 여성은 전화기 너머 친구가 바로 앞에 있는 듯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정을 쏟아내기도 한다.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는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흥에 넘쳐 외국인인 우리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나폴리의 중심가는 그 전체가 하나의 큰 마라도나 박물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벽화에서, 티셔츠에서, 기념품에서, 음식점에서, 그 어디에서나 마라도나를 볼 수 있다.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출신 축구선수이지만 나폴리가 거의 제 2의 고향이라고 할만큼 나폴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그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에너지 드링크의 마라도나
나폴리 축구팀 선수들의 사진으로 장식된 거리
나폴리 축구팀 선수들이 그려진 벽
마라도나를 비롯하여 과거에 나폴리 소속으로 뛰었거나 현재 뛰고 있는 축구선수들의 그림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뛰어난 수비수인 우리나라의 김민재 선수도 보인다. 나폴리에서 만난 현지인들이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오! 킴민줴! 위 러브 킴민줴."일 정도로 김민재 선수의 인기가 대단했다.
나폴리팀에서 뛰었던 김민재 선수
마라도나는 신들린 실력으로 나폴리팀을 정상에 올리는 데에 큰 공을 세웠던 선수이다. 그런데 나폴리 사람들이 그를 아끼는 이유는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보다 뛰어난 다른 팀들로부터 스카웃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나폴리 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나폴리팀에 남았던 선수였다. 이런 그의 인성은 그가 가진 재능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마라도나를 기리고 기도하는 사람들
한 음식점의 벽면을 가득 채운 마라도나 그림과 피규어들
아래의 두 사진은 신성모독논란의 여지가 있어 이 글에 실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나폴리 사람들에게 있어 마라도나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 여겨 싣게 되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에게 신에 가깝도록 절대적으로 추앙을 받는 신화적 존재로 남아 있다.
마라도나. 그는 더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이곳 나폴리에,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서 존경을 받는 행복한 인물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으로 꼽히기도 하는 톨레도역은 벽과 천장을 덮은 모자이크화로 유명하다.
모자이크가 나폴리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가지각색의 모양과 색깔을 가지고 크기도 전부 미묘하게 다른 모자이크 한조각 한조각은 나폴리 사람들 같았다.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자유분방하면서도, 한데 모이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완성되고 나면 그 올록볼록한 표면이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모자이크화.
나폴리의 톨레도 지하철역 모자이크 벽화
작품에 심취한 아티스트
나폴리에서 물건을 주고 받는 법
한 피자집의 천장 밑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귀엽다.
오후가 되어 에스프레소를 한잔 더 마시러 아무 카페에나 들어갔다. 사람들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서 커피 머신 앞, 가로로 긴 모양의 탁자에 기대어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길 기다린다. 바리스타는 빠른 동작으로 에스프레소를 건네고, 그를 받아든 사람들이 5분 정도 머무르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줄지어 서서 오른손엔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홀짝이며 왼손은 탁자에 기대어 서로의 소소한 근황을 나누는 시간. 나폴리에서 매일 볼 수 있는 아주 보통의 일상이다.
해가 저물자 나폴리 항구와 바다 위에 뜬 성곽은 연푸른 지중해의 저녁빛깔로 물들어 간다.
파도치는 방파제를 따라 걷는 밤거리에 어디선가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돌린 곳엔 네명의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길거리 공연이라기 보다 자유를 만끽하는 청춘들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