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탄 밀라노행 버스는 보통이라면 저녁 10시에는 도착했어야 하지만, 4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우리는 오전 2시경에나 터미널에 떨궈졌다. 밀라노에서는 에이욥이라는 남편의 고향친구가 살고 있어서 우리에게 방을 내어주기로 했다. 그 집은 밀라노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외곽으로 나가야 했는데 새벽 2시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아 우린 24시간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하나씩 시켜두고 먹다가 쿨쿨 졸다가를 반복하며 첫차가 운행하길 기다렸다.
마침내 동이 트고 우리는 기차에 올라 에이욥을 만나러 갔다. 이른 아침이라 잠에서 덜깬 졸린 눈을 비비며 에이욥이 마중을 나왔다. 집으로 가니 에이욥의 어머님께서 감사하게도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계셨다. 차를 마시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부족한 잠이 쏟아졌다. 티타임이 끝나고 남편은 에이욥과 커피를 마시러 나가고, 나는 방에서 짧은 단잠을 잤다.
에이욥은 밀라노 공항에서 근무를 했다. 우리가 방문한 그날도 일이 있었던 에이욥은 출근 때문에 우리와 같이 하지는 못했다.아쉽지만 우리끼리라도 밀라노 중심가로 나갔다.
밀라노 대성당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념비
트램이 지나는 흐린 날 밀라노의 오후 거리
베스파를 탄 커플의 로맨틱 드라이브
전날 잠을 잘 못잤더니 체력이 쉽게 떨어졌다. 운하가 있어 산책하기 좋은 나빌리오 지구에서 휴식을 취하려 잠시 멈췄다. 나무 아래 그늘진 벤치가 있어 나는 그곳에 앉고 남편은 내 다리를 베고 누워 모자란 잠을 청했다.
남편이 자는 동안 나는 남편의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손장난을 치며 강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것도 바라보고, 이따금 보트가 지나가는 것도 보고, 강가 산책로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눈을 쉬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우리가 쉬고 있는 벤치에서 1미터 정도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들고 있던 카메라의 초점을 우리에게 맞췄다.
진분홍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카메라 하나만 달랑 든 그의 모습은 집근방으로 산책 나온 주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면 밀라노에서 이름난 사진작가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준비된 모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찰나에 스치는 보석같은 순간을 찾아 포착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몇초간은 약간 놀라기도 하고 조금은 당황한 마음에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이 분이 원한건 이런 게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카메라를 의식한다면 사진사는 '들키지 않고 숨어서 찍었어야 하는데'하며 실망할 것이고,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된 이 사진은 곧 버려질 것이었다.
난 얼른 모르는 척 시선을 내리깔고 그저 하던대로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확인한 사진사의 표정이 다행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인 채 다음 피사체를 찾아 천천히 걸어갔다.
사진이 찍힐 당시에 나는 사실 남편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숨은 새치를 찾아 뽑으며 놀고 있던 건데, 사진사의 눈에는 퍽 다정한 장면으로 보였을까.나중에 남편이 일어났을 때 이 얘기를 해주니 쿡쿡 웃었다.
그 사진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까? 인화되어 어느 액자에 소중히 걸려 있을까? 부디 솎아져 버려지지 않고 어딘가에 잘 쓰이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