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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Dec 02. 2024

만나기 참 어려웠던 하바나

쿠바- 하바나

 야구계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이 있다. 야구 뿐 아니라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비행 중에 떠올리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도미니카 공화국 푼타 카나의 공항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 채 해맑게 웃던 시간.


 오늘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나 쿠바로 가는 날이다. 오후 10시경 경유지인 파나마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쿠바 하바나를 향해 순조롭게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제 비행기도 몇 번 타봤다고 익숙하다. 처음엔 공중에 떠오르는 그 순간의 울렁한 느낌이나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흔들릴 때의 아찔함에 손바닥을 적시곤 했는데, 지금은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여유가 생겼다. 파나마에서 하바나까진 2시간이 조금 넘는다. 14시간에 육박하는 비행도 해봤는데 이 정도 짧은 비행쯤이야 코 몇 번 골다 보면 도착해 있을 터였다.

 2시간은 금방 흘러 비행기는 경로를 따라 빠르게 하바나로 접근해 갔다. 기장실에서 착륙을 준비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기체가 점차 내려간다. 비행고도 2000m, 1500m, 800m, 650m.. 하바나를 밝히는 불빛들이 비행기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문제는 이때 발생했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비행기 날개가 심상치 않게 흔들린다. 창문에 부딪혀오는 비바람이 거세진다. 지상에 돌풍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다 내려앉았던 비행기는 공항 바로 위에서 그대로 방향을 틀어 다시 고도를 높였다. 화면 속 지도에 연두색으로 그려지는 비행경로가 둥근 원을 그리며 공항을 벗어나고 있었다. 기장님은 다시 한번 착륙을 시도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며 공항으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비행 고도를 낮추자 또다시 기체가 좌우로 오뚜기처럼 요동을 쳤다. 착륙 재실패. 기체가 다시 솟아오른다. 비행기 내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마다 얘기를 나누거나 영화를 보던 승객들이 지금은 다들 숨을 죽이며 비행경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장님은 세 번째로 착륙을 시도한다. 나는 옆자리 남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진땀이 난다. 앞자리의 할머니께서도 두려우셨는지 할아버지의 어깨에 포옥 기대신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한 듯 강한 바람에 맞서 비행기가 활주로 바로 위까지 내려앉았다. 곧이어 쿵 소리와 함께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다. 제법 큰 충격이 전해졌지만 어쨌든 땅을 달리고 있으니 이제 되었다 싶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멈추길 기다렸다. 근데 무언가 이상하다. 불과 3초가량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던 비행기가 다시 각도를 높여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아..!" 승객들은 놀람과 절망의 탄성을 내질렀다. 말로만 듣던 고어라운드(go around, 착륙이 불가능하다 판단될 때 내려가던 비행기를 다시 올리는 것)를 생애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비행기 사고는 이착륙 시에 가장 흔히 발생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보통 비행 중 난기류를 만나 흔들릴 때가 가장 공포스러웠지, 이착륙 시 문제가 생긴 일은 겪어보질 않아 몰랐다. 그러나 오늘. 세 번의 고어라운드, 아니 정확히는 두 번의 고어라운드와 한 번의 터치 앤드 고(touch and go, 활주로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착륙이 불가능하여 다시 이륙하는 것)를 겪고 나자 비행에서 이착륙이 가장 어렵다는 말이 이제야 와닿았다. 실제로 난기류를 만나는 것으로는 사고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륙이나 착륙 시에는 기체 결함이나 사나운 날씨로 인해 큰 사고가 나기도 한다. 고어라운드나 터치 앤드 고는 착륙 시 기체가 바람에 흔들려 기울어져 부서질 위험이 있거나, 활주로에 예기치 못한 물체가 있어 충돌 위험이 있을 때 급하게 다시 이륙하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기술이다.



 세 번의 착륙 실패 끝에 기장실에서 방송이 나왔다. 악천후로 랜딩에 실패하였고 계속 재시도하기엔 연료가 부족하여 주유를 위해 자메이카로 항로를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네? 자메이카요?
그렇게 갑작스러운 자메이카행이 시작됐다.

 30여분 만에 자메이카의 몬테고베이 공항에 닿았다. 원래라면 하바나의 숙소에 도착했을 시간, 우리는 몬테고베이 공항에서 동이 틀 때까지 비행기 안의 좁디좁은 좌석에 앉아 선잠을 자다 깨다 반복했다. 이른 아침 6시 공항 문이 열리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친 승객들은 줄지어 짐검사를 받고 공항 안에 들어갔다.
"일정에도 없던 자메이카에 다 와 보네 하하. 앞일 참 알 수 없다."
 밥 말리와 우사인볼트의 나라 자메이카는 남편에게 비자가 필요하기도 했고 시간도 넉넉지 않아서 이번 여행에서는 뺀 나라였다. 하나행도 미뤄지고 제대로 못 자서 피곤도 했지만 그 덕에(?) 자메이카의 한 공항에서 일출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게이트 앞의 의자에 널브러져서 탑승 안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각자 모자란 잠을 청했다. 무료한 기다림 끝에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탑승이 다시 시작되었다. 승객들에겐 물 한 병과 과자가 제공되었다. 저가 항공사라 그런지 기내식이 따로 없어 우린 어젯밤부터 음료와 과자로만 버티고 있었다.

 모두가 타고나서도 우리 비행기는 좀처럼 출발하질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하바나의 기상이 어제보다 더 안 좋아서 파나마행을 고려 중이라는 것이었다.
네에? 이번엔 다시 파나마요?
그렇지 않아도 하루를 통째로 날렸는데 오늘마저 하바나에 갈 수 없을 수도 있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며칠 전 미국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했고 그 영향이 쿠바까지 미쳐서 풍속이 거셌던 것이라고 했다.


 얼마 뒤 기장님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리는 하바나로 갑니다."
"예에-!!"
뜻밖에도 파나마로 갈 줄 알았던 비행기는 하바나행이 결정되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것이었다. 모두들 집에 가고 싶었기에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렇게 둥실 비행기가 떠올랐다.

 30분 뒤 비행기는 다시 하바나의 상공에 있었다. 창밖은 비가 오지도 바람이 부는 것 같지도 않았고 구름도 차분해 보였다. 어쩌면 이번엔 괜찮지 않을까? 살짝 희망이 생겼다.
"승객 여러분. 랜딩합니다."
비행기는 차츰 고도를 낮춰갔다.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800m, 600m, 400m.. 땅이 가까워진다.
그때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악! 어떡해."
구름 위에서는 평화로워 보였던 공기가 지면에 가까워지자 휘몰아치며 기체를 마치 종이비행기처럼 들었다 놓았다. 승객들은 심각한 얼굴로 돌풍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엄마 소리가 나왔다. 이러다 정말 죽는 건 아닐까. 남편 목을 꽉 끌어안았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파도 위의 보트처럼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리던 지옥 같은 시간은 참으로 길게도 느껴졌다. 그쯤 되니 차라리 파나마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은 그래도 침착했다. 나는 속으로 거의 울고 있었는데 누구 하나 소리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쿠바 안 가도 좋으니 살려만 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가까스로 비행기는 다시 떠올랐다. 결국 우린 파나마로 방향을 틀었다. 기체가 안정을 되찾았다. 후우.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바로 저 아래에 집을 두고도 내려갈 수 없는 승객들은 안타까운 신음만 뱉을 뿐이었다. 그래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보단 나았다.


 파나마에 도착한 승객들은 공항 내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바우처를 하나씩 받았다. 24시간 만의 제대로 된 식사였다. 곯은 배라도 채우고 나니 살 것 같았지만 문제는 아직도 파나마에 있다는 것이었다. 하바나행 비행기가 3시간 뒤에 다시 이륙할 것이라는 안내가 있었지만, 바람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안정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또다시 고어라운드를 겪었다가는 정말 패닉이 올 것 같았다.


 공항에서 밥을 먹으면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던 노부부께선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이셨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사신다는 그분들은 우리처럼 첫 쿠바여행을 가시는 길이라고 했다.
"비행기가 세 번이나 착륙에 실패했을 때는 우리도 정말 두려웠어요. 아주 심하게 흔들리더라고요. 무리해서 착륙을 강행하지 않고 비행기를 돌린 기장의 선택이 아주 똑똑했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분들의 말에 동감했다.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다.
"지금쯤 허리케인이 좀 가라앉았으려나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푸근한 인상의 어머님으로부터 '괜찮을 거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우문을 던져 보았다.
"글쎄요. 그러길 바라야죠 호호."
곧바로 현답이 돌아왔다. 지금으로서는 모두 함께 무사 도착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곧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르기 전, 구글에 하바나 기상상태를 검색해 보았다. 현재 풍속은 초속 18m 정도. 금일 하바나에 착륙을 시도했다가 강풍을 맞았을 때 즈음의 풍속을 확인해 보니 초속 30m였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은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얼마간의 비행 후 우리는 다시금 하바나의 상공에 있었다. 깨도 깨도 반복되는 악몽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나 행복한 현실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승객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스크린의 비행경로를 주시했다. 비행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착륙이 임박했을 때는 농담이 아니라 수능 때보다도 쪼금 더 떨렸던 것 같다.
고도 250m. 착륙 직전이다. 기체가 기우뚱하고 한두 차례 중심을 잃는가 싶었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버텨봐.
쿵!
거센 마찰음과 함께 날개에 저항하여 쏴아아 맞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속도가 줄어들며 몸이 앞으로 확 기울어졌다. 성공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비행이 끝나면 기장님과 승무원님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며 승객들이 박수를 치는 경우가 있다. 오늘 하바나에서의 박수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고, 단전에서부터 터져 나온 기쁨의 함성이 비행기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월드컵에서 골이 터졌을 때의 객석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하바나에 오다니! 되게 힘든 여정이었다. 그렇지?"
24시간의 기나긴 악몽의 터널을 드디어 빠져나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많은 비행경험들 중 최악의 비행이자 최고의 착륙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하늘 위에서의 시간도 다 지나가고 마침내 지상에, 하바나에 와있다. 내딛는 걸음 하나, 마시는 공기 한 모금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무탈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웰컴 투 쿠바!"
그렇게 쿠바와의 첫 만남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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