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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Dec 09. 2024

Our wine is sour but it's ours

쿠바- 하바나

 하바나에도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비싼 음식점들이 있지만, 동네 사람들이 보통 다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면 놀라운 가격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모든 음식이 3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후식으로 커피나 차를 한잔 하러 카페에 가면 남편의 에스프레소와 나의 허브티를 다 합쳐 1달러를 내고 마실 수 있다.


 분위기를 좀 내보고 싶다면 비싼 바가 떠오르겠지만 하바나에서는 굳이 큰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기분 좋게 한잔 할 수 있다. 칵테일 한잔에 2달러 정도로 저렴한 로컬 바들이 있기 때문이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에 라이브 음악까지 흐르는 곳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꼭 그런 곳이 아니라도 괜찮다면 비용면에서 부담이 덜한 로컬 바를 추천한다.


 오늘도 하바나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며 거리를 걷는다. 마치 승마모자처럼 생긴 검정색의 오래된 헬멧을 쓰고 오래된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옮기는 일꾼들. 정성들여 광택을 낸 올드카 택시를 모는 운전자들. 쿠바의 상징인 시가를 입에 물고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긴 어느 노인.

 그들에겐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겐 한 장면 한 장면 놓치기 아쉬운 필름영화같다.



 

길을 걷다 한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아... 쏘리. 잉글리쉬 플리즈..?"

스페인어를 못하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 그가 이번엔 영어로 말했다.

"오, 미안해요. 나는 당연히 쿠바 사람인줄 알았어요. 하하하."

남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에게 흔한 일이었다. 마법같은 남편의 외모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가도, 브라질에 가도, 쿠바에 와도, 현지인처럼 보는 묘한 얼굴이다.

 우리에게 말을 건 그는 하바나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종종 음악공연에서 연주도 하는데 오늘 밤에 본인이 연주하는 클럽에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티켓값을 물어보니 우리에겐 좀 비싸서, 제안은 고마우나 거절했다.

"그보다 저희는 오늘 오픈카 투어를 하고 싶은데요. 혹시 어디가면 오픈카 투어를 좀 저렴하게 할 수 있는지 아시나요?"

"오, 오픈카 투어라면 제 친구들 중 한명이 하고 있어요. 원한다면 좋은 가격에 친구와 연결해줄게요."

"와, 그럼 감사하죠!"

잠시 뒤 홍색 오픈카를 탄 그의 친구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처음으로 타보는 오픈카가 신기하고도 설렜다. 날씬한 핸들이며 길쭉한 기어변속기며 넓은 가죽시트까지 어느하나 낭만 없는 구석이 없었다.


 쿠바 국회의사당부터 시작하여 구시가지인 올드하바나, 그속의 여러 광장들, 길게 이어진 방파제 해변인 말레콘, 그리고 혁명광장까지 1시간 가량을 드라이브했다. 운전기사님은 감사하게도 가이드이자 사진사 역할까지 해주며 우릴 데리고 다니셨다. 기사님을 소개해준 우리의 친구도 조수석에 타고 넷이서 같이 다녔다.

국회의사당





올드 하바나의 거리들


시원하게 부서져 도로까지 물을 적시는 말레콘의 파도


우리 뒤에서 또 다른 오픈카 투어 중인 여행객들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끌었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도 보인다.


 오픈카 투어가 끝나갈 즈음 음악선생님인 우리의 친구가 무언가를 건넸다.

"받아요. 선물이에요."

"우와! 체 게바라잖아?"

기념으로 한장 갖고 싶었던 체 게바라 지폐와 동전이었다. 금은 더이상 발행되지 않기에 기념품으로 관광객들이 사기도 하는 돈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후에는 숙소 근처로 돌아와 거리의 올드카들을 좀더 둘러보았다. 해가 질때 즘엔 길거리에 커다란 냄비를 두고 수프를 요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판매용인지 이웃들과 다같이 나누어 먹으려고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프를 젓는 중간중간 노래를 틀어두고 살사를 추기도 하는 모습에 보는 사람도 흥이 난다.




 저녁에는 카우치서핑으로 알게 된 한 가족을 만나러 간다. '티'라는 이름의 호스트는 멕시코인 남편 '후안'과 5살배기 귀여운 아들 '마르코'와 함께 살고 있었다. 린 패티의 가족과 같이 저녁의 하바나를 산책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가족이었고 특히 마르코는 작은 다람쥐처럼 통통 튀고 너무도 귀여웠다. 쉽게도 패티는 그날 하필 발목을 접질려 집일찍 들어가 쉬었고 후안과 마르코하고만 산책을 계속했다.

 안은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수년 전 세계를 여행하다가 쿠바에 도착하였고 하바나라는 도시가 마음에 들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이 걷는 동안 그는 여느 가이드 못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알찬 설명을 들려주었다.

"덕분에 야경 투어하는 기분이에요!"

말레콘에서 귀염둥이 마르코와 함께


안녕 마르코!

"말레콘은 그냥 평범한 해안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해질녘에 걸으니 그만의 감동이 있네요."

"맞아요. 저도 쿠바에 서 매일같이 말레콘을 걸었어요."

후안이 말레콘 위에 떨어지는 석양을 지긋이 바라보며 후안이 말했다. 마르코는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후안은 패티와 결혼하여 마르코의 아빠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과거의 그는 깃털처럼 유로운 영혼의 영화감독으로 한곳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고, 패티 역시 친구들과 춤추고 파티하기를 즐기는 어린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런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했을 때, 그 누구도 그들이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안은 병원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두 사람에게 생겨난 아이가 마르코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마르코의 엄마아빠가 되어, 남들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부모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코는 기적과도 같은 아이네요."

"정말 그렇죠."

비에하 광장. 후안은 이곳의 한 단골 커피숍에 앉아 영화제작에 필요한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곤 했다고 한다.


 하바나의 길 대부분은 돌로 포장되어 있는데, 중간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로 포장이 된 바닥을 걷게 되었다.

"이곳의 바닥이 왜 나무 블럭으로 포장된지 아세요?"

"음..글쎄요. 왜 그런가요?"

"여기 보이는 건물은 과거 스페인에 의한 식민지배 시절 한 장교가 살던 집이었어요. 어느날 그의 아내가 말했죠. '말 발굽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어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요. 그리하여 장교의 명령으로 돌바닥이 나무바닥으로 교체가 되었죠."

"와아.. 단 한 사람의 불평으로 바닥까지 뜯어내다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무 블럭으로 포장된 길바닥


 이어서 걷다가 한 동상을 보게 되었다. 후안이 그 동상의 주인공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 남자는 과거 하바나에서 '파리의 기사(knight)'로 불렸던 람이에요. 길거리의 부랑자였지만 항상 파리의 귀족처럼 입고 다니기도 했고 행인들에게 시를 낭송해 주기도 하는 등 신사적인 면모에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었죠.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다가 정신병에 걸려 보호소에서 말년을 맞이하게 돼요. 여기 보시면 왼손의 검지손가락이 가늘어진 것 보이세요? 관광객들이 하도 많이 만져서 닳아 가늘어진 것이랍니다. 왜 그의 검지손가락을 만지는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마 에 얽힌 소문 같은 게 있나봐요."

파리의 기사 동상


밤거리와 올드카


후안은 영화감독답게 진을 찍는 기술이 남달랐다.

"물웅덩이에 비친 조명을 찍으시는 거예요?"

"네. 화에서도 더 밝고 아름다운 화면을 위해 쓰기도 하는 방법이에요."

우리도 그를 따라 아래처럼 한장 찍어보았다. 낮이었다면 그저 흙탕물이었을 웅덩이가 밤이 되니 조명을 비추는 멋진 거울이 된다.


 

어디 가니 마르코?

 

 패티의 가족은 곧 후안의 고향인 멕시코로 이주할 생각이라고 다. 마르코도 키워야 하는데 쿠바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은데다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심은 점차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쿠바인인 패티와 마르코는 곧 멕시코 비자를 받아 후안을 따라 멕시코로 떠날 것이다.


 어젯밤에는 우리 숙소의 주인이셨던 쿠바인 아주머니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 이에 지쳐 타국으로 가는 국민들.

 주인 아주머니의 딸도 핀란드로 이주해 살면서 그곳에서 살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께서도 핀란드로 가서 사실 생각은 없으세요? 따님이 거기 계시면 더더구나 이민하시기 쉬울텐데요."

아주머니는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여셨다.

"핀란드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예요. 나도 우리 딸 집에 가서 꽤 오래 지내면서 경험해보았지요. 그런데 나는 쿠바에서 살거예요. 쿠바의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가 했던 말도 있잖아요. Our wine is sour, but it's ours(우리의 와인은 시큼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가슴에 깊은 파장을 만들어 낸 그녀의 말은 그 후로도 우리가 쿠바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구절이 되었다. 

 맛없는 와인일지라도 우리의 것.

 노예로 살던 날들, 헐값으로 궂은 일에 시달리는 노동자로 살던 날들, 나라 없는 고통을 견뎌 내절에 살면서도 쿠바인들은 까지 나라를 지켜냈다. 지금도 여전히 현실은 어렵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쿠바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더 넓은 기회를 찾아 쿠바를 떠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몸이 어디에 있던 그 뿌리는 쿠바에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과거부터 결코 편한시절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굴곡진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이 땅을 지켜내고, 우리 것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시점에도 역시 풀어야 할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는 우리이지만, 그렇다하여 본인의 뿌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다. 렇게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나라는 또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쿠바도, 우리나라도, 그리고 분쟁과 붕괴를 겪고 있는 다른 모든 나라들도.

체 게바라 깃발을 단 오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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