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나의 동쪽에는 바라데로라는 바닷가 휴양도시가, 서쪽에는 비냘레스라는 산촌이 있다. 그동안 바다는 볼만큼 봤다는 생각에 이번엔 비냘레스에서 이삼일 정도 머물기로 했다.
비냘레스 가는 길, 구슬치기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비냘레스에서는 산과 들을 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그것이 바로 이곳의 매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 안에서 지친 마음을 쉬어갈 수 있다. 마을 안에는 조그마한 투어 회사들이 몇 군데 있는데,들길을 따라 말을 몰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투어, 바위산에 있는 거대한 벽화를 보러 가는 투어 등이 있었다. 우리는 내일 날짜로 말타기 투어를 신청해 두고 오늘은 숙소에 일찍 들어가 쉬었다.
비냘레스의 흔한 풍경
움집처럼 보이는 어느 창고
평화로움 그 자체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올드카들
쿠바 국기와 체 게바라
비냘레스에 밤이 오면 집집마다 미리 충전된 휴대용 전등이 켜지거나 발전기가 돌아간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전기는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 3시간 정도, 오후에 2시간 정도 들어오고 이외에는 전기공급이 끊기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와이파이도 에어컨도 없이 지내야 해서 불편하기도 하다. 근데 여기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좋기도 하다. 폰 없이 바깥과 단절되어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생기고, 과하게 에어컨을 쐬어 칼칼했던 목도 돌아왔다. (밤중에 창을 열고 자야 해서 모기에 뜯기는 건 익숙해지기 어려웠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장 좋은 점은 바로 밤하늘을 선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냘레스는 우선 맨눈으로도 은하수가 살짝 보일 만큼 대기가 맑고, 밤에 전등도 가로등도 안 들어오므로 별빛과 달빛만이 밝게 비춘다. 좋은 카메라가 없어 아쉬웠지만 휴대폰 카메라로도 하늘 가득한 별들을 조금은 담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투어를 위해 '말이 끄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시골길이 시작되는 장소에서 오늘의 가이드님이 두 마리의 말과 함께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탔던 말의 이름은 '까라멜로'였는데 먹성이 아주 좋은 친구여서 10미터씩 갈 때마다 풀을 뜯으러 한눈을 팔곤 했다.
"또 먹니 까라멜로? 맛있어?"
대답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신나게 흔들며 와작와작 풀을 씹어먹는 까라멜로. 처음 타보는 말이라(아주 예전에 제주에서 작은 말을 타본 적은 있지만 그땐 한 5분이나 탔으려나. 해서 타본 걸로 치기가 좀 그렇다.) 겁이 나고 엉덩이도 안장에 자꾸 부딪혀 아팠는데 까라멜로의 예기치 못한 먹방에 웃으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가이드님도 웃으며 연신 '바모스(Vamos, 스페인어로 '어서 가자'라는 뜻) 까라멜로!'를 외쳤다. 그럼 까라멜로는 쩝쩝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까라멜로에 비해 남편의 말은 아주 착실하게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약간의 승부욕도 있어서 까라멜로가 앞서 가려고 하면 쏜살같이 치고 나가며 선두를 지켰다. 중간에 물이 불어나서 꽤 깊었던 개울물을 만났는데, 다부진 허벅지로 남편을 태우고 무사히 건너기도 했다. 모로코에서 말을 많이 타보았던 남편은 말을 빠르게 몰아서 달리기도 했다. 그에 맞춰 남편의 말은 열심히 뛰어주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그 말의 이름은 잊어버리고, 걷기보다 풀 뜯기에 집중했던 우리 까라멜로의 이름만 기억나다니. 이래서 학창 시절 선생님들께서 모범생보다는 한 번씩 말썽 부리는 학생이 나중에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던 건가 보다.
복스럽게 먹는 까라멜로
반면에 말 잘듣는 남편의 말
중간에 담배 농장을 갖고 있는 어느 농부의 집에 내렸다. 이곳에서 쿠바 담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다.
잠깐 쉬고 있으렴.
색색의 닭들 사이 귀여운 청소년 닭
개울을 건너다 젖은 발을 말리는 우리 가이드님
아래의 사진에서 왼쪽 위의 사진이 식물 담배이고 오른쪽 위는 담배의 씨이다. 담배씨는 먼지보다도 작아서 후 불면 날아가버린다.
재배한 담배는 말려 담뱃속 내용물을 만들고 이를 담뱃잎으로 감싸서 시가를 완성한다. 담뱃잎은 감싸기 전에 큰 줄기를 제거한다. 줄기에 강력한 중독성분이 들어있어 제거하지 않으면 너무 해롭기 때문이다. 잘 감싼 담배는 틀 안에 넣어서 꾹 누르고 그 끝을 동그란 가위로 잘라내어 마무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쿠바 담배의 95%는 정부에 납품해야 한다. 나머지 5%는 사적으로 판매가 가능하여 주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고가에 팔 수도 있다고 한다.
농부 아저씨께서 맛보라고 주신 쿠바의 술. 왼쪽이 진품, 오른쪽은 누가 봐도 조잡해 보이는 가품. 여행객들은 잘 모르고 가품에 속는 경우가 있다며 주의를 주셨다.
담배 농장 견학이 끝나고 다시 까라멜로에 올라 다그닥 다그닥 시골길을 걸었다. 저 멀리 벽처럼 넓게 이어진 산등성이가 마을을 감싸안고 있었다. 일출시간에 맞춰 저 산의 꼭대기에 오르면 운무 위로 섬처럼 떠오른봉우리의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산에 오르려면 먼저 등산로 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마침 우리 가이드님이 아시는 택시기사님이 계셔서 다음날 아침 일찍 그분과 만나기로 해 두었다.
바퀴 없는 소 달구지가 흙 위를 미끄러져 간다.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왔다. 신발과 종아리가 온통 진흙 투성이였다. 말을 탈 때는 몰랐는데 쉬면서 보니까 근육통이 상당했다. 다리 뿐 아니라 말 위에서 꼿꼿이 중심을 잡느라 종일 긴장했던 배와 등의 근육까지 뻐근한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고통스럽기 보다는 수영을 하고 난 후처럼 기분 좋은 근통이었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어젯밤처럼 남편이랑 별을 보면서 쉬고 있는데 가이드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최근 내린 비로 인해 산으로 가는 길이 아직 물로 가득해 내일 새벽 등산은 갈 수가 없다는 연락이었다. 안타깝지만 길이 막혔다니 방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출풍경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아쉬운대로 가이드님이 보내준 사진을 올려본다.
아.. 이걸 못 보다니 너무 아깝다.
비록 비 때문에 등산은 못했어도 언제 또 타볼까 싶은 말도 마음껏 타보고 밤이면 반짝이는 별들도 하염없이 세어 보았던 비냘레스에서의 날들. 쿠바를 찾는 분들에게 하바나 말고도 한곳을 더 추천한다면 주저없이 이곳을 고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