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나를 걸으면서 남편과 줄곧 불러댄 노래, '관타나메라'. 쿠바의 민요로 '관타나모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쿠바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시구에서 가사를 따왔다고 한다.하바나의 거리에 한걸음 내디디면 자연스레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콧속에서 흥얼흥얼 재생된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의해 노예가 되어 쿠바로 이주를 당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낯선 땅에 정착하며 그들만의 음악을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듣는,슬픈 듯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용기와 기개가 느껴지는, 그들만의 개성을 가진 리듬과 멜로디가 탄생하게 되었다.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성을 가진 그들의 노래는 가본 적도 없는 쿠바라는 땅에 대한 향수마저불러일으킨다.만일 이를 들어본 적 없는 이에게 한 마디로 묘사하고자 한다면, 꼭 맞는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쿠바'라는 단어 밖에는 그 정서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숙소 전망
숙소 거실
하바나의 숙소는 대체로 아주 저렴하다. 에어비앤비에서 가장 싼 방을 예약해도 상태가 썩 괜찮고, 조금 더 돈을 쓰면 아주 멋진 전망의 별장 같은 숙소에서 지낼 수도 있다. 우리는 고민하다 비용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도 테라스에서 내다본 풍경은 좀 더 좋은 숙소를 포기하고 이곳을 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숙소를 나서면 비슷한 모습의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벗겨지고 희미하게 바래버린 외벽의 색들마저 멋스럽다. 시간을 되돌린 듯 과거에 갇혀버린 도시가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거리에는 종종 그 옛날 체 게바라가 타고 먼 땅을 누볐을 그것과 비슷한 구식 디자인의 오토바이가 보인다. 그 위에 펄럭이는 쿠바의 국기. 하바나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장면이다.
쿠바에는 다른 나라라면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도로에서 보기 힘든 옛 자동차들이 흔히 돌아다닌다. 고풍스러운 차들만 구경해도 심심하지 않다. 각진 모서리, 동그란 라이트, 한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도색. 왜 요즈음에는 이런 디자인의 차들이 사라진 걸까. 기술력은 성장했다 해도 미적 기준으로만 보았을 땐 과거의 차들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쿠바의 작은 버스는 8~10명이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끼어서 탄다. 홈이 파인 도로를 지날 때면 낮은 천장에 머리가 살짝 부딪히기도 한다. 커브를 돌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천장에 있는 봉을 잡고 버틴다. 조금 불편은 해도 현지 사람들과 직접 부대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이다.
미니 버스
미니 버스의 내부
스페인의 장기간 식민지배를 견디어 낸 끝에 가까스로 독립은 하였으나 사실상 미국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으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은 쿠바와 단교를 하며 물자 교류의 길을 막아 버리고쿠바는 가난한 고립국가가 되고 만다. 이후 소련의 지원마저 불가능해지면서 나라는 더욱 빈곤해지게 된다.
그러고 보면 체제라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너도 나도 다 함께 잘살자 하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다니. 그저 내 방식과 다르다고 하여 한 나라를 순식간에 망하게도 만들 수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힘이 없어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외톨이도 있다. 때로 이런 국가 간의 갈등은 여느 학교폭력이 자행되는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 강자들 틈바구니에 살아남으려면 그보다 강해지거나 반항은 꿈꾸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가야 한다. 신체적 또는 경제적 위력을 과시하는 몇몇 학생들과 그들의 폭력을 피하려 숨죽이고 살아가는 다른 학생들이 있는 어느 교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비단 쿠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열강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몰락하거나 테러범으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를 '독재자와 테러리스트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 낸 열강의 의로운 승리'로 예쁘게 포장하여 내놓는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쿠바의 국기가 그려진 어느 건물이 녹슬고 허물어져가고 있다. 마치 망가진 쿠바의 경제 상황을 보는 것 같다.
보수되지 않은 집들, 화장지가 없는 화장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숙소, 가로등 없는 밤길.. 이것이 쿠바의 현주소이다.
몇 년 전부터는 미국과 재수교를 하면서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다지만 국민들의 삶이 눈에 띄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위 사진에 보이는 돈뭉치는 미국달러로 그리 크지 않은 돈을 쿠바화폐로 환전한 것이다. 이 돈은 하바나를 떠날 때까지 화수분처럼 끝날 줄 몰랐다. 무리해서 아껴 쓰지도 않았는데 돈이 줄어드는 걸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쿠바에서는 두 주머니 가득 두둑이 부자가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동시에 얼마나 그 화폐가치가 낮은 지를 실감하면서 현지 국민들의 생활고가 상상되어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낡은 건물 꼭대기에 파릇한 나무가 싱싱한 기운을 뽐내며 자라나고 있었다.
쿠바라는 나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다치고 쓸렸지만 그 상처를 딛고 다시금 일어나기를.
그들은 과거에 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시계를 멈춰버린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우리를 설레게 한다.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기에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을 계속 간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를 접하니 때때로 마음이 쓰렸다. 아름다워서 더 가슴을 시리게 하는 쿠바의 얼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