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주니어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라 보카(La boca)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축구팀이다. 아르헨티나 최고의 축구 클럽들 중 하나이며 전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클럽이기도 하다. 축구의 전설로 불리는 마라도나 선수가 뛰던 팀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보카 주니어스라는 이름을 이번 여행에서 남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남미에 오기 전 영국을 여행하면서 리버풀 구장 투어를 했던 날. 프리미어 리그 경기 티켓을 구하는 게 만만한 일도 아닐 뿐더러 그 땐 경기 시즌도 아니었기에, 경기 관람은 꿈도 못꾸고 구장 투어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짐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 아르헨티나에서는 경기장에서 현장 관람 해보자."
그 다짐대로 바로 오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팀 홈구장으로 향하고 있다.
보카 주니어스의 직관 티켓을 구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현지인들에게 물어 물어 발품을 팔아 찾아 다녔지만 정식 표를 구하려면 결국 보카 주니어스 클럽에 가입된 현지인들의 계정으로만 구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관광객으로서는 암표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우린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한 청년에게 연락을 취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고맙게도 그 친구는 경기 당일 암표 구매를 직접 도와주겠다고 했다.
암표를 파는 사람들은 수시로 말을 바꿔가며 더 높은 비용을 제시했다. 우리는 나름 에누리라면 여행 중에 잔뼈가 굵어 자신 있었는데도,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티켓의 공급량, 그리고 관광객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려는 판매자들의 고집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지치긴 하였지만, 축구팬인 남편과 꼭 같이 보고 싶었던 경기이고 태어나 처음 구장에서 관람할 기회인 만큼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곡절이 있긴 했지만 마침내 경기장 입장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현지인 친구의 도움이 정말 든든했다. 그는 현금이 부족했던 우리를 대신해 망설임 없이 계좌이체까지 해주었다. 나중에 남편이,
"우리가 돈 안 부쳐주면 어떡하나 걱정은 안 됐어? 어떻게 처음 본 우릴 그렇게까지 믿어줄 수가 있었어?" 라고 물었을 때에도 그 친구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었기에 낯선 이에게도 의심 보다는 신뢰를 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친구는 가지고 있던 흰색 보카 주니어스 유니폼까지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구장 근처는 벌써 축제 분위기이다. 길가에서 고기를 불판에 가득 구워 팔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을 추고 응원가를 부르며, 거리는 온통 보카 주니어스를 상징하는 깃발과 장식들로 꾸며졌다. 우리도 축제 분위기를 즐기며 저녁 식사로 길에서 바로 구워낸 두터운 소고기를 넣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놀다보니 어느새 입장 시간이다.
안전을 위해 관람객들은 물 한병 과자 한봉지도 외부로부터 반입할 수 없다. 나도 들고 있던 손바닥만한 접이식 우산을 밖에다 놓고 경기장에 들어갔다.
"우산까지 놓고 가라니.. 너무 깐깐한 거 아냐?"
"하하, 처음이라 좀 낯설지? 원래 경기장 들어갈 땐 폰 말고 거의 아무것도 못 가져가."
"아 원래 그런 거구나."
보카 주니어스 구장의 이름은 라 봄보네라 (La bombonera), 초콜릿 상자라는 뜻인데 구장의 모양이 꼭 초콜릿 상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깜찍한 이름에 노랑 파랑이 섞인 발랄한 색감까지 더해져 마치 장난감 레고마을에 들어온 기분도 들지만, 관중이 가득 차고 응원이 시작되면 아기자기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광란의 함성이 울려퍼진다.
선수들이 막강한 경기력을 갖추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보카 주니어스 경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건 관중들의 응원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최고로 꼽히는 보카 주니어스의 응원은 그 익어버릴 듯한 열기가 경기 끝까지, 아니 끝나고도 한참을 더 이어진다. 사실 보카 주니어스 경기의 주 관람 포인트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관중들의 응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이 뛰면서 소리를 지르다 보면 두 시간이 금방이다.
우리가 있던 관중석은 좌석이 따로 없고 모두가 1센티미터의 간격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관람을 했다. 누구 하나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려고도, 앉으려 하지도 않았다. 정신 없이 서로 어깨를 맞부딪히며 한목소리로 응원하는 데에만 열과 성을 다했다. 가장 저렴한 티켓으로 살 수 있는 자리이면서, 가장 가까이서 현장의 열띤 공기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였다.
빈자리 없이 꽉찬 경기장에는 우레처럼 울리는 응원가와 북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그 기세를 타고 보카 주니어스가 첫 골을 넣었다. 귀가 터질 듯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고 열기는 장작이 더해진 불처럼 한층 더 뜨거워졌다.
경기는 1대 0, 보카 주니어스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축하했다. 상대팀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닌 다른 도시의 팀이라고 들었는데 검고 흰 줄무늬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홈구장으로 모인 보카 주니어스 응원팀이 당연히 사람수도 훨씬 더 많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찔러서 상대 응원팀은 눈에 띄질 않았다. 보카 주니어스의 독무대나 다름 없었다.
남편이 그토록 바랐던 보카 주니어스의 경기를 끝내 보고야 말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터질 듯이 뿌듯해져 왔다. 나야 뭐 축구를 그다지 즐기지 않으니 굳이 직접 관람까지 하지 않아도 상관 없었지만, 남편에게는 페루의 마추픽추만큼,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만큼이나 값진 경험이었다. 남편은 예전에 핀란드에서 오로라를 본 적이 있는데, 오늘 보카 주니어스 경기를 본 것이 오로라를 두 눈으로 보았던 것보다도 인생에서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일이라고 했다. 또한 나에게도 오늘은 인생 처음 축구 경기를 현장에서 관람한 날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 어느 팀도 아닌 보카 주니어스의 경기를 말이다. 그 폭발적 열정은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축구의 축자도 모르던 나였는데 이젠 왜 축구 팬들이 현장 관람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