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엘 찰텐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친 남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지역. 동명의 의류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파타고니아 로고에서 보던 깎아지른 봉우리, 바로 '피츠로이'산을 실제로 보기 위해 오늘 엘 찰텐으로 간다.
엘 찰텐은 피츠로이산을 보기 위한 등산을 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 지역의 작은 도시이다. 이곳에 가려면 먼저 엘 칼라파테라는 도시로 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엘 칼라파테로 가는 비행기는 닥쳐서 구매할 수록 정말 사정 없이 비싸지기 때문에 되도록 일찍 구매할 것을 추천드린다.
엘 칼라파테 공항에 내리자 공기의 질부터 다르고 하늘은 청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깨끗하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계획할 때 엘 찰텐의 피츠로이를 먼저 갈 것인지, 엘 칼라파테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먼저 갈 것인지 고민하다가 전자를 택했다. 왜냐하면 엘 칼라파테 시내까지는 어차피 멀었고, 공항에서 엘 찰텐까지는 직통버스가 있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린 김에 바로 버스를 타고 엘 찰텐으로 가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엘 찰텐에 다다랐다. 11월 중순의 파타고니아는 한낮이면 겉옷을 벗어도 괜찮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하다. 완벽한 날씨도, 저 멀리 구름을 얹은 설산 봉우리도, 한산하고 조용한 마을도. 모든 것이 꿈에 그리던 파타고니아의 작은 마을 그 자체였다.
엘 찰텐은 풍광에서도 아이슬란드에 비견되지만 또 한가지, 생활비도 아이슬란드 못지 않게 많이 든다.. 가능하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먹거리를 좀 챙겨가거나, 엘 칼라파테를 먼저 들른다면 그곳은 물가가 괜찮은 편이니 거기 마트에서 먹을 걸 미리 사가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아무것도 없이 엘 찰텐에 간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물어서 그나마 저렴하다는 마트에서 재료들을 사서 요리를 해 먹었다.
피츠로이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등산코스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라는 호수에서 보는 풍경이 멋있다고 하여 그 코스가 가장 선호도가 높다. 우리도 그 코스를 택하여 갔다. 왕복 8시간의 장거리 산행이었다.
이미 피츠로이에 다녀간 여행자들의 후기를 보니 일출에 붉게 물든 피츠로이 정상(일명 불타는 고구마)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산을 타는 분들도 많았다. 아니면 캠핑 장비를 준비해서 오후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중간에 일박을 하고 디음날 해 뜨는 시간에 맞추어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에 도착하는 코스로 가는 분들도 있었다. 너무 일찍 일어날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캠핑을 할 상황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냥 이른 아침 시작하여 정오 즈음에 호수에 도착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로 가는 길에는 다른 몇몇 호수들도 있다. 그 역시 경치가 빼어나 중간에 자주 멈춰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었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두 시간 정도 걸었을 땐 정상이 꽤나 가깝게 보였다. 두근두근. 얼른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좀 더 잰걸음으로 걸어본다.
마침 물통에 물이 다 떨어졌을 때 반가운 냇물이 나타났다. 산 위의 눈이 녹아내려 흐른 물이라 깨끗하고 맛도 나쁘지 않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호록호록 마시기도 하고 물통에도 가득 물을 채워 다시 길을 나선다.
이 냇가를 기점으로 쉬운 길은 끝나고 고행길이 시작된다. 이제 남은 건 가파른 오르막 뿐.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골반 위에 양 손을 얹고 한발 한발 올랐다.
"엄마 모드 ON 이야?"
"응, 여기서부턴 엄마 모드 켜야 되겠어."
'엄마 모드'는 엄마한테 허락도 안받고 쓰는 우리 둘만의 용어이다. 등산 도사 엄마랑 등산을 하면 우리는 힘차게 두팔을 흔들며 걸어도 진이 빠지는데, 엄마는 허리춤에 두손을 얹고 무슨 마실 가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시는 게 참 신통하다. 그래서 우리도 산행 중 힘이 달릴 때는 허리에 손을 얹고서 '엄마 모드'를 켜는 것이다.
"응? 이상하네. 엄마 모드로 걸어서 그런가. 생각만큼 안 힘드네."
"엇 나돈데. 신기하다."
이만큼 오르면 보통 얼굴이 토마토가 되면서 목구멍에선 쌕쌕 쇳소리가 나야 되는데 희한하게 오늘은 할 만 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아!! 우리 볼리비아에 있다가 와서 그렇구나."
그랬다.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고산환경에 적응된 몸 덕분이었던 것이다. 해발 4000~5000미터 고도에서는 산행은 커녕 숙소 앞 가게에 물만 사러 나가도 숨이 찼는데 이곳에 오니 허파에겐 천국이 따로 없다. 불과 며칠 사이에 몸이 이렇게 바뀌다니 인간은 분명 적응의 동물이 맞구나 하고 스스로 감탄하며 남은 길을 올랐다.
이윽고 피츠로이의 정상과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지칠대로 지쳐 올라온 등산객들은 힘든 것도 잊고 눈 앞의 호수와 그를 둘러싸고 창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봉우리들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거울처럼 사방을 비추고 있는 맑은 호수로 인해 그 풍광은 배가된다.
우린 미리 입고 온 보카 주니어스 유니폼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뛰어난 경관 중 한 곳이니 아르헨티나의 가장 뛰어난 축구팀 중 하나의 유니폼을 입고 찍어보면 어떨까 해서 떠올린 아이디어였는데, 사진을 찍고 보니 호수의 색과 옷 색깔이 잘 어울리기도 하였다.
그 어떤 유명 셰프의 음식보다도 고된 등산 끝에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 등산객들은 너도나도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없었지만 세계 3대 미봉 중 하나를 배경으로 한 최고의 식당이나 다름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혹시 '라구나 토레' 라는 다른 호수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올라온 것과는 다른 길로 빙 돌아갔다. 근데 그 길이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려서 라구나 토레로 연결되는 분기점에 도달한 것이 오후 세시 즈음이었다. 빨리 걸으면 일몰 전에는 어떻게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 일단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가장 멋진 호수를 보았으니 되었다 하고는 출구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는 오전 8시부터 산을 탔는데 만약 라구나 토레까지 한번에 보고 싶으신 분들은 좀더 이른 아침에 시작하고 체력 분배를 잘 해서 도전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총 8시간의 긴 산행 후에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는 오늘 총 걸은 거리가 30km를 넘었다. 여행하면서 가장 장거리를 걸은 날이었다. 그야말로 대장정이었고 다녀와선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그를 보기 위해선 더 힘든 여정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피츠로이의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