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아르헨티나 최대의 빙하이자 남아메리카에서는 두번째로 큰 빙하인 페리토 모레노. 그 이름은 19세기 파타고니아를 탐험하였으며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아르헨티나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모레노의 이름에서 따왔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가려면 엘 칼라파테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인당 왕복 4만페소(40달러)로 몇달 사이 비용이 두배로 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무서울 정도다.
"뽑아둔 달러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어쩌지."
"그러게.. 흠.."
"히치하이킹?"
"그럴까? 한번 해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가서 3일을 더 지내야 하기에 달러를 최대한 아껴야 했다. 카드로 티켓을 살 수도 있었지만 비용의 10%를 더 부과한다. 큰 돈은 아닐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나가는 돈은 왠지 더 아깝다. 그래서 우린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히치하이킹 중.
30분 정도 지났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어깨가 뻐근해 온다. 후후이에서 살타로 가는 길에 그리 쉽게 성공했던 히치하이킹인데 여기서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등을 때리는 아침 바람이 제법 날카롭다. 그러나 애초에 2시간까지는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었던 우리기에 다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때 한 은색 승용차가 천천히 달려왔다. 우리는 반갑게 엄지를 추켜세우며 손을 흔들었다. 차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우릴 지나쳐 간다.
"에이.. 이번에도 아니네."
"어? 아냐! 저기 봐!"
남편이 뒤를 돌아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우릴 몇미터 지나친 차는 저어기 갓길에 서 있었다.
"우와 멈췄다 멈췄어!"
우린 아이들처럼 신나게 차로 뛰어갔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내리고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흰 페리토 모레노 빙하까지 가요."
"네네. 우리도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가요. 얼른 타요!"
야호!! 우린 뒷좌석에 탔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는 우리와 얘기를 하며 가고 싶다고 본래 뒤에 앉아 있던 그의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이름이 브라이언이라는 우리 옆자리의 그는 칠레에서 왔고, 마티어스라는 이름의 같이 탄 친구는 아르헨티나 사람인데 호스텔에서 만나 오늘 같이 빙하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들이 탄 차는 택시였다. 어떻게 갈지 고민하던 두 사람은 둘이서 택시를 타고 그 비용을 공유하기로 했다고 한다. 기사님은 그들이 빙하를 보는 동안 3시간을 거기서 기다려 주셨다가 다시 태우고 엘 칼라파테 시내로 돌아오는 것까지 해주시기로 한 상태였다.
"너희가 내키면 우리랑 비용을 조금 나눠서 내줘도 되는데, 그게 힘들다면 걱정 말고 그냥 타도 돼."
브라이언이 말했다. 그냥 타는 건 같은 여행자끼리 도리가 아니었다. 실은 히치하이킹을 어찌저찌 성공하여 빙하까지 간다고 해도 돌아오는 길에 또 어떻게 차를 잡을 것인지도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저비용으로 걱정 없이 왕복 교통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같이 내자! 태워줘서 정말 고마워."
그렇게 버스비의 반값으로 안락한 교통수단을 얻은 우리, 그리고 택시비를 분담하게 된 브라이언과 마티어스까지 모두 행복해졌다.
"나도 어제 사실 히치하이킹 하려고 너희가 서있던 도로변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브라이언이 말했다.
"진짜?"
"응. 근데 3시간이 지나도 멈추는 차가 없었어. 팔이 너무 아파서 결국 포기하고 마티어스랑 같이 오늘 택시를 잡은거야."
"저런,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너희가 똑같은 자리에서 히치하이킹 하는 걸 보는데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춥고, 손 시렵고, 팔 아프겠다. 나도 어제 그랬는데' 하고 생각이 들어서."
브라이언의 말을 듣는데 아이슬란드에서의 하루가 떠올랐다. 렌트카를 몰아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두명의 히치하이커를 태워준 날이었다. '춥고, 가방도 무거워 보이고, 차도 몇 대 없는데.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하는 마음에 바로 차 문을 열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제의 베풂이 오늘의 은혜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택시 기사님 '카를로스'는 매우 친절하셨다. 빙하의 입구에 도착하기 전부터 저 멀리 빙하가 보이는 전망대가 몇 군데 있는데 그곳에서도 중간중간 멈추어 사진을 찍어 주시기도 했다. 추운 몸을 녹이도록 따끈한 마테차도 건네 주셨다.
곧 모레노 빙하의 입구에 정차했다. 우리는 빙하를 보러가고 카를로스 기사님은 주차장에서 다른 택시기사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시기로 했다. 빙하의 주변으로는 따라 걷기만 하여도 빙하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와아. 진짜 방대하네."
"그러니까. 길이가 무려 30km에 폭도 5km나 된대."
오기 전 사진으로 보았을 때도 굉장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실제로 보니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였다. 저 뒤의 산까지 촘촘하게 닿아 있는 서늘한 색의 얼음을 보고 있자니 마치 빙하기로 잠시 시간이동을 한 기분이 들었다.
걷는 도중에 잊을 만하면 한번씩 굉음이 들려온다. 천둥소리와도 비슷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다.
"아..."
쿠르릉 소리가 들리면 관광객들은 흠칫하며 떨어져 내리는 빙하 조각을 멍하게 바라본다. 전체 빙하에 비해 작은 크기라서 조각이라 표현했지만 한번 떨어질 때 결코 적지 않은 양의 빙하가 우수수 추락하며 물을 크게 출렁인다. 온난화로 인해 꾸준히 크기가 줄어들고 있으며 머지 않은 미래에 흔적 없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는 모레노 빙하. 한 덩이씩 무너져 내릴 때마다 마치 내 소유물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진작에 이 지구를 아끼고 보살폈다면 어쩌면 이 슬픈 이별을 방지하거나 최소한 미룰 수라도 있었을까. 거의 다 잃어갈 때 즈음에서야 내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들지만 때는 한참 늦어버린 후다. 그 냉혹한 소실의 현장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벌을 받는 기분이다.
"이 정도로 심하게 녹아내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응.. 수년 뒤엔 이 절경을 못볼 수도 있다니, 너무 마음 아파."
아래의 사진으로 모레노 빙하가 처한 실상이 또렷이 보인다. 위성사진에 찍힌 빙하는 1968년부터 2020년대인 지금까지 한결같이 줄어들고 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말도 안되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면서, 시시각각 바쁘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긴 세월 담담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자연에 감탄하였다. 또한 그와 동시에, 항상 변치 않아줄 것만 같은 자연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음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와중에 우리는 서로 더 갖겠다고 남이 가진 것을 약탈한다. 내 영역을 가꾼답시고 남의 영역에 쓰레기를 버리고 더럽힌다. 땅을 가지고 싸우고, 자연의 산물을 독차지하겠다고 약자를 죽이고, 이젠 심지어 물까지 훔친다. 그러는 동안 아낌 없이 주기만 할 것 같은 이 땅도 조금씩 병들고 메말라 간다.
모든 것은 유한하다. 지금은 내가 다 가진 것 같아도 언젠가는 바닥이 난다. 남이 갖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독점하겠다는 욕심으로 씨를 말려버리는 인간의 행동은 그 종말을 더 앞당길 뿐이다. 지금이라도 남은 것들을 함께 지켜나갈 수는 없을까?
다시 카를로스 기사님의 택시를 타고 엘 칼라파테 시내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브라이언과 마티어스를 만난 덕분에 추운데서 떨지 않고 안락한 차로 따뜻하게 집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우리야말로! 이어지는 여행도 잘 하고. 우리 헤어지기 전에 사진 한장 찍을까?"
"당연히 좋지!"
"자, 하나 둘 셋, 예에에에에에에에에~!"
우리는 브라이언의 고향인 칠레 남부의 마푸치족 사람들 방식대로 '예에에에에'를 외치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마푸치족 사람들은 기쁨을 표현할 때 "예에에에~ 예이 예이 예이 예에에에에~ 히이이이이 하아!" 하고 시원하게 내지른다고 한다. 빙하는 보는 내내 브라이언이 '예이예이예이'하면서 돌아다녔던 이유가 있었다. 아무튼 유쾌한 친구들을 만나 파타고니아에서의 마지막 날도 참 즐거웠다.
내일이면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가 며칠 쉴 계획이다. 길어 보였던 남미에서의 일정도 끝이 보인다. 남미 대륙의 마지막 목적지인 이과수 폭포를 들른 다음 우린 다시 북반구로 날아가 여행을 이어갈 예정이다.
파타고니아, 다시 만나길 기원하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