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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에서 연료 안 쓰고 바이크 타기?!

파키스탄-훈자 밸리

by 소울메이트

들어가기에 앞서 훈자에서 묵었던 숙소를 독자님들께 소개해드리고 싶다. 우선 방값이 싸서 고른 숙소이긴 한데 지내면서 꽤 맘에 들었다. Tourist cattage Hunza 라는 이름의 호스텔이다. 방은 막 문을 열면 좀 춥지만 욕실에 따뜻한 물은 잘 나오고 방마다 사장님께서 히터를 놔주셔서 잘땐 추운줄 모르고 잤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사장님의 김장솜씨. 김장을 할 줄 아신다고 하면 한국인 사장님이신가?하고 다들 의문을 가지시겠지만, 놀랍게도 순수 파키스탄인이시다. 훈자를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기도 하고 한국문화에도 원래 관심이 있으셔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직접 김장을 하신다고 했다. 한국인인 나도 엄마 김치만 먹고 손수 담가본 적이 없는데(사실 한번 있는데 멸치액젓 조절 실패로 괴상한 김치가 탄생한 이후 다신 안 만든다) 역만리 시골마을의 외국인 사장님이 김치를 담그시다니 벌써 호감도 상승이었다. 사장님께선 공짜로 김치 맛 한번 보라면서 한접시를 내주셨다. 양파, 고춧가루, 마늘 정도만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단순한 얼갈이 김치였다. 그런데 한입 먹었을 땐 무슨 우리나라 김치냉장고에서 갓 꺼내 온 김치처럼 본토의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아니 파도 부추도 안 넣고 어떻게 이 맛을 내신건지. 나라를 잘못 골라 태어난 김장 천재이신가 싶었다. 결국 돈 주고 한 접시 추가로 시켜 먹고 맨밥 한공기까지 시켜 밥에 김치만 올려서 뚝딱 먹었다.

만약 이 호스텔에 정말로 가시는 독자님들이 계시다면 꼭 김치를 시켜드셔 보시길 바란다.

아침의 호스텔 테라스 풍경. 이것만으로도 방값은 했다.


뷰만 좋은 줄 알았더니 음식맛도 준수함!



한국인이라면 웰컴 드링크보다 훨씬 반가울 웰컴 김치까지 챙겨주시는 호스텔 사장님에서 벌써 느껴지겠지만, 훈자는 파키스탄에서도 사람 좋기로 소문 난 동네이다. 정확히는 훈자를 포함한 '길깃 발티스탄'주의 주민들이 유독 더 정이 많고 푸근하다.

훈자에 도착했는데 숙소까지 타고 갈 교통수단을 잘 못 찾겠다? 그럼 한 10분 투자해서 차가 좀 다니는 큰길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보자. 바이크든 트럭이든 당나귀가 끄는 수레든 누구든지 10분 안에 멈출 확률이 음.. 80퍼센트는 된다고 본다. 우리도 숙소에서 시내로 나갈 때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한 5분만에 트럭 한대가 서더니 운전자분께서 뒤에 태워주셨다.

훈자에서 트럭타고 시내가기. 표정은 웃고 있지만 칼바람에 손가락이 가락가락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공기 맑은 자연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이래서 다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자라는 걸까.



"오늘 바이크 빌려서 저기 이웃마을까지 다녀오자."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남편이 한 말이다. 난 정말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수기의 중심, 2월의 겨울을 나고 있는 훈자에 온 것만 해도 동네 사람들이 '이 날에도 관광객이 오네'하며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바이크를 빌리자니.

"바이크 위에서 얼어 붙을 일 있어..?"

그랬더니 남편은 또 그 특유의 낙천적 웃음을 눈꼬리가 휘어지게 날리면서 '나만 믿어라'를 시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한숨을 폭 쉬면서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믿긴 뭘 믿나. 그냥 내 허술한 겉옷이라도 믿어보자 하고서.


지금 당장 떨어져 내려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예비 낙석.


숙소가 있는 '카리마바드'에서 '파수'라는 동네까지 다녀오는 게 오늘의 일정이다.

파키스탄 산지는 낙석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지그재그로 층이 나 언제 떨어질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바위산 옆으로 우리의 하찮은 바이크가 달려갈 때마다 쿠르릉 무너져내리는 돌덩이들이 상상되어 눈이 질끈 감아지곤 했다. 어떤 바위는 무슨 시루떡 층처럼 아래층 바위 위에 뭉텅 올려져 있어 누가 살짝 건들기만 하면 미끄러져 내릴 것처럼 생겼다. 난 애써 반대편의 산 풍경으로 눈길을 돌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다가도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낙석 따윈(?) 잠시 잊게 된다.


좀더 달리면 터널이 연이어 나오는 구간이 있다. 근데 터널 안에 조명이 하나도 없을 줄이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바이크의 라이트에만 의존해서 달렸다. 우리가 빌린 바이크는 수십년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해왔는지 엔진 소리도 맥 빠진 기침 소리같고 라이트도 침침한 데다 시동한번 걸려면 운 좋을땐 서너번에서 게는 스무번까지도 도를 해야 했다. 그래도 달려주니 고맙긴 했지만 터널 안에서 라이트가 거의 보이지 않아 폰 전등을 켜고 앞을 비추면서 달렸다.

바이크는 달리다가 종종 멈추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진땀을 빼면서 재시동을 거는데 그것도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매뉴얼 바이크라 막 밀고 끌어서 억지로 시동을 걸 수는 있었다.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 다행이었다.

한 터널 안에선 어둠속을 달리다 한줄기 빛이 보여 기뻐했는데 알고보니 천장 보수공사 중이었다. 용접 불똥이 떨어지는 공사현장 앞뒤로 차들이 기다렸다가 수신호에 맞춰 간간이 통과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다이나믹한 파키스탄이었다.


빛 하나 안 드는 터널



윽. 공사중인 터널에 들어와 본 적이 있던가.


나는 이해하기 힘든 남편의 신남 포인트


파키스탄과 중국 간의 교류에 쓰일 도로의 일부이기도 한 카라코람 하이웨이


여러개의 터널을 통과하여 나오면 아타바드 호수가 우릴 반겨준다. 이는 2010년에 발생한 대규모의 산사태로 태어난 신생 호수라고 한다.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던 재해였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호수는 슬프게도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 작가님의 브런치북을 소개한다. 우리부부의 여행기가 경험 위주로 서술되었다면, 이 브런치북에선 아타바드 호수의 탄생 비화를 비롯해 훈자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내용들을 배울 수 있어 같이 읽으면 파키스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unza


살얼음 낀 아타바드 호수



이땐 그냥 감자튀김인 줄 알고 먹었는데 '파코라'라는 파키스탄 현지 음식이었다.

파수가 가까워지자 수의 대표 봉우리인 '폽단' 산이 보인다. 그 모양이 멋지면서도 악마처럼 삐죽삐죽하여 악마의 산으로도 불린다. 파수의 초입에 있는 '후사이니 서스펜션 다리' 위에 서면 투폽단 산 전체가 들어오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후사이니 다리


좌우로 흔들려서 건너기가 은근 무섭다


쪼그려 앉아 강을 바라보는 두 사람


파수에 살구 케이크를 파는 Glacier breeze, 일명 빙하 산들바람이라는 예쁜 이름의 카페가 있다고 하여 우리도 가보았다. 살구 케이크라니 우리에겐 조금 낯설지만 살구가 이 지역 특산품이라 여기선 딸기주스 바나나주스보다 살구주스를 더 자주 팔 정도이다. 곳곳에서 파는 말린 살구는 한 박스 사가면 선물로도 좋아 보인다.

아무튼 빙하 산들바람까지 달려갔는데 이럴수가, 문을 닫았다. 긴 산들바람이 아니라 칼바람 부는 비수기에 와서 영업을 기대하는 게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따뜻한 커피에 살구 케이크를 생각하고 왔다가 우린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이제 그만 카리마바드 돌아가자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추운 날씨마저 깜빡 잊게 하는 파수의 풍경이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파수의 그림 같은 풍광


돌아오는 길에도 바이크는 자꾸 멈춰댔다.

"이 정도면 바이크 대여비 조금 깎아줘야 된다, 그렇지?"

투덜투덜 하면서도 어찌저찌 바이크를 끌고 다시 터널이 있는 곳까지 달려 왔는데, 때마침 바이크님이 탈탈 거리다가 이내 또 멈춰버리고 만다. 이번엔 진짜로 영영 멈춰버린 건지 재시동도 안걸린다. 행운이나 불행이나 왜 가장 완벽한 순간에 일어나곤 하는지. 하필 터널의 한 가운데서 이럴 게 뭐람! 다행인건 돌아오는 길엔 드디어 전력이 공급되는지 터널 안 전등이 모두 켜져 있어 앞은 보였다는 것이다.

왜 하필 여기서 멈추십니까.

바이크를 가에 세우고 어찌할까 고민하는데 커다란 차들이 터널 저편에서 쌔앵 달려온다. 남편은 문제를 찾으려 바이크를 계속 살펴봤고 나는 혹시나 차들이 바이크를 못보고 칠까봐 폰 전등을 켜고 흔들어 우리가 여기 있음을 알렸다.

몇 대의 차가 릴 지나쳐 갔는데 그 중 한 흰색 승용차가 지나가다가 스르르 속도를 줄이더니 후진하여 우리에게 다가왔다. 두 명의 남성분들이 타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에요?"

"안녕하세요! 저희 바이크가 안 움직여요.."

그분들은 곧바로 차를 비상용 주차공간에 세우시곤 우리 바이크를 봐주셨다.

"아~ 이거 연료가 없네요."

"네에? 연료 문제였어요?"

연료가 떨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카리마바드에서 주유를 하고 오긴 했는데 그게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바이크 자체 결함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그럼 이제 어떻게 여길 빠져 나가냐가 문제다.

그분들은 바이크를 눕혀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음. 보니까 바닥에 조금 깔린 연료가 있네요. 제가 바이크를 살려 볼테니까 남은 연료로 일단 여길 나갑시다. 터널을 나가자마자 아마 연료가 바닥날거예요. 그럼 그때 또 방법을 찾아보죠."

다시 바이크를 세우고 드르륵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놀랍게도 눕혀서 몇번 흔들었다고 바이크의 시동이 걸렸다!

"세상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의 바이크가 터널 밖까지 나가는 동안 그분들은 차로 바이크 앞을 달리며 우릴 계속 지켜봐주셨다.

터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정말 연료가 다 떨어졌다.

"자 이제 어디서든 기름을 좀 와서 넣어봅시다."

그 때 한 바이크가 터널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멈춰서있는 우리를 보고 바이크 운전자분이 다가오셨다. 그분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럼 제 바이크에서 좀 드릴게요."하고 선뜻 연료 뚜껑을 열어주셨다.

"앗 근데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이렇게 나눠주셔도 가시는 데까지 충분할까요?"

"네네 걱정 마세요."

"너무 감사해요. 연료값으로 이 돈이라도 받아주세요."

"아유 주지 마세요. 괜찮아요. 당신의 우리의 형제니까."

You are my brother. You are my guest.

당신은 우리의 형제. 당신은 우리의 손님.

파키스탄에서 정말로 이 말만 수십번을 들었다. 어딜가나 우린 환영받는 손님이자 사랑받는 형제였다.


남 일도 내 일처럼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훈자 사람들


"자, 이제 연료가 좀 생겼지만 이게 아마 카리마바드까지 충분하진 않을 수 있으니까 막 속도내지 마시고 내리막에선 엔진 끄면서 기름 아끼시고. 아셨죠?"

"네, 감사합니다 정말!!"

그렇게 훈자의 이웃들이 우릴 살렸다.

우린 내리막에서 아예 엔진을 끄고 달리며 연료를 아꼈다. 남편은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동력을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 뒤에서 낄낄거렸다. 연료 없이 바이크를 굴려보긴 또 처음이다.

영차영차

그리하여 무사히 카리마바드에 도착했다. 그 어느때보다 추웠던 바이크 라이딩에 손도 볼도 얼어붙었지만 마음만은 그 언제보다도 따뜻해지는 하루였다.


훈자. 말로만 듣던 곳에 와보니 명실상부 감탄이 나오는 경치였다. 날만 따뜻했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더 살고 싶어지는 곳. 때 묻지 않은 자연과 그를 닮은 사람들이 있어 더 아름다웠던 곳. 그들이 있기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 싶은 곳, 훈자였다.

광대한 산 위에 따개비처럼 군데군데 붙은 집들


다음을 기약하며 안녕, 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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