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홍콩 영화 특유의 색감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영화 속 장소들을 직접 걸어보려 홍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나는 홍콩 영화를 즐겨 보거나 내용을 잘 알진 못하는데, 홍콩 배우들의 어딘가 우수에 찬 눈빛, 원색으로 빛나는 화려함 뒤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지는 도시의 배경 등이 고정된 이미지로 떠오르는 정도이다.
"여보는 옛날에 홍콩에 가봤다며."
"응. 대학 졸업여행으로 삼사일 정도. 주로 번화가에서 쇼핑하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그랬어. 그런데 나는 뭐 사는 거를 별로 즐기지 않아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여행은 아니었어."
캐리어가 두둑하게 기념품을 모아 담거나, 수첩에 적어간 방문지 리스트를 다 지우도록 열심히 코스를 짜 돌아다니는 건 내 취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번째로 간 홍콩에선 비싼 쇼핑몰도, 거창한 놀이공원도 예정에 없었지만, 남편과 숙소 바로 앞에서 우리돈으로 오천원짜리 해물국수를 먹고 습기가 훅 끼쳐오는 더운 바람을 맞으며 흔하디 흔한 트램을 타고 돌아다닌 소소한 일들이 잔잔히 기억에 남는다.
홍콩은 어두운 밤이 되어야 그 진면목을 환하게 드러낸다. 일몰 시간에 맞춰 언덕에 오르자 하나둘 불을 켜 야경에 빛을 더해가는 빌딩들이 바라다 보였다. 어느 보석을 확대했을 때 보이는 빼곡한 결정들의 모습마냥 촘촘히 모인 마천루들이 황홀하게 도시를 밝혔다.
남편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옆에서 홀로 팔을 쭈욱 뻗어 사진을 찍고 계신 한 아저씨를 보았다. 셀카봉 없이는 혼자서 담아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저희가 찍어드릴까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관광 오신 거예요?"
"아뇨. 저는 홍콩 사람이에요. 지금은 호주에 산지가 수년째인데, 오랜만에 고향에 왔어요."
여러해가 흐른 뒤 다시 찾은 고향의 야경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서 계시는 아저씨를 뒤로 하고 우린 먼저 언덕을 내려왔다.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극심한 곳을 꼽으라면 홍콩이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까지도 몰랐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의 겉껍질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방 한칸을 구할 돈이 없어 침대 하나에 겨우 세를 내어 살아가는 빈민들의 속사정을 볼 수 있다. 극도로 집약적이고 열악한 주거공간의 대명사인 익청빌딩은 삼면이 아파트로 둘러싸여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기이한 풍경에 영화 트랜스포머 촬영지로도 알려져 지금은 관광객들의 사진촬영 장소가 되었지만, 실제로 이곳 거주민들은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연상케하는 고층빌딩의 군데군데 드러난 낡은 철골과 빛바랜 페인트칠 같은 것들이 또 홍콩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라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 직장인들의 출퇴근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출근시간에는 하행, 퇴근시간에는 상행으로 운행 방향도 바뀐다. 우린 에스컬레이터가 한 방향으로만 운행한다는 걸 모르고서 저녁에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땐 그 긴 거리를 도로 걸어서 내려왔다. 내리막이라 그리 힘들진 않았지만 직접 걸어보니 에스컬레이터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느껴졌다. 콜롬비아 메데진의 코뮤나 13에서도 야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그곳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며 남편의 입이 벌어졌다.
사실 홍콩은 땅이 넓다거나, 휴양하기 좋은 바다가 있다거나, 자연 경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거나 하는 여행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냥 걸어다니다 아무 계획 없이 멈춰선 곳에서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을 보기도 하고, 강변의 야경에 넋을 놓기도 하고, 홍콩에서만 맡을 수 있는 공기와 그만의 정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홍콩이 비록 제일가는 관광지로 꼽히진 않을지라도 대체 불가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