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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Jun 13. 2022

르반 - 빈 속에 먹지 마시오

모로코 여행기 #22

아침 일찍부터 붑커와 나는 커다란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오늘의 행선지는 마라케시와 더불어 모로코 대표 관광도시로 꼽히는 북쪽의 파란마을, '셰프샤우엔'이다.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셰프샤우엔.


굽이치는 나무가 파란 담벼락과 잘 어울린다.



라바트에서 셰프샤우엔까지는 차로 꼬박 5시간이 걸린다. 장시간 운전에 지칠만도 한데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예쁜 풍경이 나올 때마다 여기 봐라 저기 봐라 하며 오히려 나를 챙겨주는 붑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미안 붑커. 다음엔 꼭 면허 따서 올게..(무면허자의 슬픈 독백)



연둣빛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는데 열린 차창을 통해 은은하고 익숙한 기가 들어온다.

붑커>> 이 냄새 뭔지 알겠어?

나>> 아 이거 진짜 익숙한데. 뭐더라...

붑커>> 올리브유 향이야.

나>> 아 맞다, 올리브유!

붑커>>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올리브유를 짜는 공장이 많아서 항상 올리브유 향이 나. 마을 이름도 그래서 '지투나'야. (올리브는 '지툰'이다.)

올리브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지은 '지투나'라는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천안은 '호두골', 영덕은 '대게촌' 이런거잖아?


올리브유 향이 가득한 지투나 지나 계속 달리면 번화한 마을에 이른다.

붑커>> 이 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들르긴 했는데 보고갈까 아니면 바로 셰프샤우엔으로 갈까?

나>> 당연히 보고 가야지!

이 곳은 초록도시 '와잔'. 셰프샤우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상당히 큰 도시다. 파란마을로 유명한 셰프샤우엔만큼 관광객들 사이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초록마을 와잔은 숨겨진 보처럼 한 쪽에서 빛나고 있다.

I love Ouezzane(와잔).


에메랄드를 닮은 와잔의 골목들은 곳곳에 비치된 초록빛 식물들과 어우러져 싱그러운 느낌을 풍긴다.


나>> 여기 진짜 예쁘다! 왜 이런 곳이 있는 걸 여태 몰랐을까? 

붑커>> 정말 예쁘지? 난 사실 셰프샤우엔보다 와잔이 좀더 좋더라.

붑커 덕분에 숨은 석을 찾았다.




셰프샤우엔에 도착했을 땐 저녁 6시 반 경이었다. 오늘의 이프타르(breakfast)는 고맙게도 호스텔 사장님께서 제공해주시기로 했다.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은 쿠스쿠스(15편 '움미는 내 편' 참고), 하레라(6편 '알 함도릴라' 참고), 각종 빵, 허브티, 그리고 르반까지 한 상 가득 저녁식사를 베풀어주셨다. '르반'은 걸죽하고 시큼한 플레인 요거트로, 보통 쿠스쿠스를 먹을 때 같이 마신다. 저녁 아단(13편 '알라후 아크바르' 참고)이 울리기 무섭게 우리는 모든 음식을 싹싹 긁어 먹었다.

나>> 와.. 진짜 배불러. 맛있게 잘 먹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곧 나에게 닥쳐 올 시련은 까맣게 알지 못한 채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다.        


누군가가 파란 별을 따다 산 위에 콕콕 박아놓은 듯한 셰프샤우엔의 해질녘 모습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음식점이 모여있는 작은 광장에 다다르면 커다란 황톳빛 건축물이 보인다. 고성? 요새? 이 건물은 무엇일까. 가까이 가보니 문을 지키는 경비아저씨들이 서 계셨고 안쪽에는 큰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붑커>> 여기서 오늘 무슨 공연을 하나본데?

나>> 오~ 그런가봐.

붑커>> 들어가보자!

알고보니 오늘은 가죽 염색 공장으로도 유명한 모로코의 또 다른 도시, '페즈'에서 온 합창단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하나둘씩 객석이 채워지고, 곧 사회자가 무대로 나와 합창단을 소개하며 공연의 막을 열었다. 날을 잘 맞춰서 왔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비로운 음색이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무대 뒤에 보이는 울창한 나무가 멋진 배경이 되어준다.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들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성인 '무함마드'를 찬양하고 그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라고 했다. 공연장으로 쓰인 이 황토색 건물은 고성도 요새도 아닌 '옛 감옥'이라고 한다. 감옥과 찬양가라니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찬양 소리는 감옥의 외벽에 가로막혀 객석으로 울려퍼지며 더욱 풍성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어갈 때 쯤 나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나>> 윽..! 

붑커>> 왜 그래? 괜찮아? 

나>> 배아파..

오른쪽 옆구리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파온다. 오른쪽이면 혹시 맹장염..? 에이 설마. 살짝 겁이 나서 배의 이곳저곳을 눌렀다가 떼보지만 다행히 떼굴떼굴 구를 만큼 아프진 않다. 열도 안나고. 일단 어디가 터진 건 아닌거 같은데 그래도 걷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 아프다.. 등 뒤에는 식은땀이 송송 맺히고 속도 메스껍다. 왜 그러지?

붑커>> 아까 저녁으로 먹은 게 잘못됐나?

나>> 글쎄..?

붑커>> 음...아! 너 혹시 밥 먹기 전에 르반 마셨어?!

나>> 르반? 응.. 밥 먹기 전에 그거 먼저 마셨는데..     

붑커>> 빈 속에 르반을 마시면 배가 아플 수 있어.

오우 노우..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벌컥벌컥 원샷했는데. 아무래도 원인을 찾은 것 같다. 문제는 아직 우리의 배낭이 차에 있다는 것. 배낭을 메고 계단을 올라 호스텔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 몸상태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할 수 없이 붑커가 앞 뒤로 두개의 배낭을 짊어지고 나는 그 옆에서 배를 움켜쥐고 걷는다. 반나절을 운전만 하느라 힘들었을텐데 짐까지 들게 하다니. 미안하다..  

나>> 붑커, 괜찮아?

붑커>> 응 괜찮아! 너는?  

나>> 괜찮.. 윽..!! 안 괜찮아.. 하하.

몇 안되는 계단이 그 땐 천리 만리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 둘 다 헥헥거리며 한계단 한계단 겨우 올라가는데 갑자기 붑커가 멈춰선다.

나>> 왜 그래?

붑커>> 여기 봐봐.

나>> 응? 뭔데? (악 배아파 죽겠다..) 

찰칵.

붑커>> 가끔씩은 밤에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지. 하하.

아오 저걸 진짜. 너는 이 상황에 사진을 찍을 정신이 있냐 이자식아아아아아.

그치만 무거운 짐은 붑커가 다 들고 있었고, 실제로 사진이 아름답기도 해서 아무말도 못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잔잔히 푸른 빛을 뿜어내는 셰프샤우엔의 골목길  

 

그 날 나는 밤새 설사와 구토를 수차례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나는 르반의 '르'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고, 엘 자디다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르반
플레인 요거트와 치즈를 섞은 듯한 맛이 나는 걸죽한 유제품.
공복에 마시면 복통으로 여행을 그르칠 수 있으니 주의하자.
셰프샤우엔에서 한 번 된통 혼난 후로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이내 그 새큼짭짤한 맛이 그리워
나중에는 식후에만 한 모금씩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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