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요리왕 비룡을 꿈꾸다

꿈꾸는 건 자유니깐요

by 문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했다. 주말은 일 안 하니깐 두 끼만 먹자.”


엄마의 철저한 조기 교육 덕분에 나는 아직도 하루 세 끼를 먹을 엄두가 안 난다. 연예인들이 시골에서 하루 종일 밥을 차려먹고, 유명한 요리사들이 나와 레시피를 공유하고, 편의점엔 매달 새로운 도시락 메뉴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밥을 중요시 여긴다는 걸 알았다. “밥 먹었니?”란 안부 인사가 허투루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 식사란 주린 배를 채우고 영양소를 얻어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내는 것이다. 살기 위한 식사. 요리도 마찬가지다. 나는 뼈저리게 느낄 정도로 요리에 재능이 없다. 그래도 굶어 죽을 순 없으니 생존을 목표로 요리를 시도하곤 한다. 하지만 재료를 다듬는 것은 어찌저찌 한다 해도, 불을 쓰고 재료를 섞기 시작하면 조리 과정이 통제 불가능이 된다.


‘헤아릴 료(料)’에 ‘다스릴 리(理)’ 자를 쓰는 ‘요리’. 나는 레시피에 적힌 올리브유 조금과 소금 한 꼬집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헤아리지 못하고, 달군 프라이팬 위에서 야채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눌어붙는 걸 다스리지 못한다. 나 같은 ‘요알못’에게 레시피는 참 불친절하다고 불평하며 단 맛, 쓴 맛 어느 맛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음식을 뱃속으로 밀어 넣는다.


(생존) 요리왕 비룡을 꿈꾸다

내가 요리에 재능이 없는 데는 먹을 복을 타고난 것도 있다. 내 주변엔 (가족 빼고) 유독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나는 문과대 풍물패였는데 풍물패답게 막걸리와 술을 끼고 살았고, 그로 인해 동아리방에서 연습을 핑계로 종종 전을 부쳐먹곤 했었다. 통상적인 엄마처럼 밥을 맛있게 해주는 언니 오빠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내 동기들은 부모님이 식당을 해서 요리에 이골이 난 동기 1과 취미로 빵을 구워 선물하는 동기 2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종종 동아리방에서 전을 부쳐 술과 함께 먹곤 했는데 몇 번의 눈여김과 주방 보조로 요리에 자신이 생긴 내가 뒤집개를 잡은 것이 문제였다. 확신을 갖고 부추전을 뒤집던 그때, “와! 전이다!”하며 달려오던 후배들이 까맣게 탄 전의 겉표면을 보고 우뚝 서 멍하니 있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내 손에 뒤집개는 쥐어지지 않았다.


자비로운 요리왕들 사이에서 배불리 얻어먹던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신림동에서 자취할 때는 누구의 도움 없이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어야 했다. 한번은 공시생인 누나의 안부를 물으러 온 동생이 너무 기특해서, 나름 정성을 쏟아부어 고추장 김치 삼겹살 볶음을 만들어줬다. 동생은 두 번의 젓가락질 끝에 배탈이 나 화장실에 갔고, 내 삼겹살은 누구의 살도 되지 못한 채 쓰레기통 속에 처박혔다. 장을 봐 오면 그중 반 이상은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는 걸 깨달은 날 과감하게 요리를 포기했다. 파스타를 만들 때가 아니면 고시 식당을 이용하거나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었다. 잘하지 못하니 흥미도 떨어지고 더이상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도 그랬을까?

주 6일을 일하고 쉬는 날엔 봉사활동을 나가던 엄마. 내가 손에 꼽는 엄마의 요리는 50줄의 김밥과 제사상에 올리는 쇠고기 적갈이다. 그 외 음식은 글쎄… 다. 엄마의 요리는 일관성이 없고 실험 정신이 강하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소금을 치는 엄마의 팔이 가볍냐 무겁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성격도 급해서 엄마만의 리듬에 맞춰 양념들을 차례차례 붓다가, 삐끗! 엇박자에 간장을 쏟기도 한다. 오늘 먹은 두부조림과 지난주에 먹은 두부조림의 맛이 다른 이유다.


재능이 ‘조금’ 모자랐기 때문에 엄마 역시 요리하는 걸 즐기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성장기 어린 자녀들에게도 삼시 세끼를 먹이는 일이 고됐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요리에 공을 쌓을 때는, 노숙자 식사 봉사를 위해 대량으로 김밥을 쌀 때와 1년에 8번 엄마와 성이 다른 조상님들을 위해 제사상을 차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