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균형 Aug 12. 2022

feat. 털의 생존 응원기

  영화 색계에서 탕웨이가 영화 내내 겨드랑이를 자연스럽게 내보입니다. 러브픽션에서는 공효진이 애인 앞에서 당당하게 털 달린 겨를 내보이는군요. 이 둘은 영화 내용을 떠나 저 털이 본인의 털인지 궁금해하는 누리꾼들에게 화자가 되었어요. 아니 대체 왜? 궁금해하는 너희의 겨드랑이에는 털이 나지 않는 거야?

  우리는 몸의 털을 없애지 못해 안달이 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털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대표적인 곳이 겨드랑이, 일명 겨털. 저는 아직 겨털을 없애지 못했어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겨털을 비롯한 어느 곳의 털도 없애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처음부터 없애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회사에 처음 취직해서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여가나 미용에 조금은 쉽게 비용을 지불할 수 있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겨털 제모였어요. 매번 면도를 하는 것이 귀찮아서 꼭 하려 했는데, 제 몸에 레이저를 쏜다는 것이 무서웠지 뭐예요. 레이저를 10번 쏘고도 계속 생긴다는 지인의 후일담에 덜컥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10번 정도 병원에 주기적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아서 이런저런 이유를 댔는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다 결혼을 하고, 신랑이 제 몸에 털이 붙어있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다 보니, 지금은 딱히 이것을 없애거나 안 보이게 가려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나 봐요.   

  첫 아이를 낳기 전, y존 제모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출산을 글로만 익히던 그때 산모의 3대 굴욕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내진, 관장, 제모 이 3가지라더군요. 어쩜, 털은 신성한 출산의 영역에도 포함되네요. 숲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할 때 잔디 풀숲을 헤치는 것처럼 털은 우리 몸의 은밀한 부위를 찾아 보물을 숨겨놓듯이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도요. 출산 전 제모를 하지 않으면 간호사가 아무렇게나 면도칼로 긁어내서 쥐 파먹듯이 이상하게 잘라 놓는다고 해요. 다른 두 가지는 나의 영역이 아니지만, 제모는 저의 선택에 의해 치욕(?)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외에도 월경을 할 때 깨끗하게 관리가 가능한 점, 성관계할 때도 깔끔할 수 있다는 점 등의 장점을 굳이 찾고 찾아 제모를 해봐야겠다고 다짐만 100번은 하다가 결국 그냥 아이를 낳았어요. 막상 출산을 겪어보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극심한 고통 속에 짐승처럼 포효하느라 '산모의 3대 굴욕' 따위 느낄 새 없던데요. 제 아이는 털이 있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조금은 포근했으려나요. 꽤 강하게 필요를 느꼈던 y존의 제모였지만 무사히(?) 잘 넘겨냈으니 앞으로도 제모 샵을 찾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은밀한 부위에 수북한 털이 있다면, 내보이는 부분에는 미세한 털이 자리 잡고 있지요. 저는 팔다리에 보일 듯 말 듯 신생아의 솜털처럼 붙어있는 털을 좋아해요. 가끔 솜털같이 부드러운 털을 팔에 자연스럽게 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섹시해 보이더라고요. 팔에 솜털이 많이 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팔, 다리에 털이 나 있는 것이 너무 싫다고 했어요. 제 눈에는 너무나 멋져 보였지만요. 어느 날 그녀가 매끈한 다리를 내보이며 제모를 하고 왔다지 않겠어요. 제모크림으로 팔다리 제모를 하기 시작했고 할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난다고 했는데 그래도 주기적으로 한다고 하지 뭐예요. 그러고 보니, 주변에 특히 여름에는 팔다리 제모를 하는 친구들이 꽤 있더라고요. 의아했어요. 여자의 팔, 다리는 매끈해야만 그 아름다움의 가치가 있는가? 자세히 보면 내 다리에도 솜털이 있는데, 나는 누가 내 다리의 솜털을 볼 것이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고, 고통을 참아가며 없앨 생각도 없었거든요. 제모를 한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제모를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그런 모양새였던 기억이 나요.  

  이쯤 되니 의문이 드는군요. 우리는 왜 우리 몸에 있는 털을 없애거나 숨기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까요. 특히 여성들이 말이죠. 사실 남자들은 팔, 다리, 심지어 겨드랑이 제모를 하지 않고도 잘만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들은 어디든 그저 자연스럽게 털을 내보이던데. 그 모양새가 불편한 것은 저뿐일까요. 아, 생각해보니 저만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저희 신랑은 반바지를 입지 않아요. 이유를 물으니 다른 남자의 다리털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은 입고 싶지 않대요. 다른 남자의 털을 의식하는 남편이 특이해서 반바지의 계절이 돌아오면 다리털이 풍성하게 드러낸 채 바지를 입고 있는 남성을 가리키며 신랑을 놀리고는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에게 나는 털도 고유한 한 영역이자 유전자의 발현으로 인한 모습일 텐데 농담거리로 악용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이후로 그러지 않고 있어요. 피부색에 따라 흑인, 동양인을 가려내며 괄시하는 모습과 제가 다른 점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어쩌면 털 관리는 자기 관리의 한 영역으로 읽히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고양이의 그루밍처럼요. 저는 가끔 신랑 콧 속을 살피거든요. 혹시나 콧 속 털 한 오라기가 삐져나온 모습이 누군가에게 발각되지 않게요. 이렇게 쓰고 보니 남자 여자를 떠나 털 관리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영역이 된 것만 같군요. 그런데 매끄러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인가요? 그렇다면 털이 나는 것은 지저분한 것일까요? 도대체 그 털이 뭐길래? 털은 우리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제 기능을 하고 있을 텐데 그 기능보다 미적 기준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워요. 이런, 보잘것없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갑자기 머릿속에 들어오네요. 찾아보니 제모는 로마시대에도 성행했다는군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제모는 필수였고 이를 위해 유해한 여러 크림이 사용되었대요. 맙소사. 털을 털어내어야만 하는 삶이 2500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고요?

  우리끼리 하는 얘기이지만, 사실 은밀하게 감추던 것을 꺼내볼 때 느끼는 쾌감이 있잖아요? 우리 몸의 털이 그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탕웨이와 공효진의 겨가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 보일 때 저는 희열을 느꼈어요. 분명 감독의 속내가 있었겠지만 그것이 뭔들, 너무 상쾌했어요. 그래 이거지. 그런데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나 봐요. 2011년 가수 레이디 가가가 겨털 인증을 선보이면서 대중적인 이목도 끌었다네요. 마일리 사일러스도 이에 동참했고요. 그리고 2014년에는 광화문에서 <이것또시위 '내 겨드랑이에 붓 있다'>와 같은 시위도 있었네요.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목소리가 느닷없이 왜 이리 반가울까요. 막상 저는 민소매 입을 때도 몇 번을 고심하다가 용기 내어놓고 팔을 잔뜩 움츠리는데, 이 세상에는 멋진 여성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제모를 하지 않은 것은 위의 멋진 여성들처럼 사회적 관습에 대한 흥미로운 도전이 아니라 귀차니즘에서 비롯된 것임을 수줍게 고백해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제모가 사회적 관습에 의한 영역이라고 하니 갑자기 억울해져서 내 털을 사랑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몸에서 정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쁘지 않다는 사회적 통념으로 잘려나가는 털들이 불쌍해졌어요. 사회에서 미미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예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제 모습이 홀연히 겹쳐 보이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제길. 보잘것없는 저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제 털을 좀 사랑해주어야겠어요. 남자들은 코털에서 해방시켜주고, 여자들은 겨털에서 해방시켜줍시다. 아니 남자 여자를 떠나 그냥 털에서 자유로워져 봅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운동을 할 때나, 더운 날씨에 민소매를 입을 때 저는 팔을 편히 들지 못하겠어요. 어휴,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군요. 다만, 이런 시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 저처럼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도 자유이 찾아왔으면 해요. 진심으로 우리 겨에 붙은 털의 생존을 응원해요. 아니, 겨털만 털인가요. 우리 몸 모퉁이 귀퉁이에 위치한 모든 털의 살아있음을 열원해요. 우리의 몸은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요. 우리 그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