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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Sep 09. 2022

feat. 미세한 근육의 떨림을 마주하다


   계단 지옥에 올랐어요. 산을 좋아해서 종종 다니곤 했는데, 와아, 이런 계단은 또 처음이네요. 한국에서, 정확하게는 남한에서 제일 높다는 산, 한라산에 오르려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하나 봐요.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든데 대체 이 계단을 옮겨다 설치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한 거죠?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롯데타워 높이가 555m래요. 저는 관음사 코스로 1330m를 오르는 데 대충 그중의 반 정도만 계단이 있었다고 해도 롯데타워보다 높아요. 롯데타워를 계단으로 오르는 것보다 더 높이 올랐어요.

네 제가 해냈습니다.


   함께 오르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제가 앞서 걸었어요. 할 만했어요. 뒤 따르는 속도에 방해되지 않으려 열심히 걸었어요. 처음 올라갈 때는 가뿐하더라고요. 등산로의 본 궤도에 들어서자 계단 오르기가 시작되어요. 이것도 초반에는 잘 올랐어요. 덜 힘들게 하려고 2칸씩 오르면서 속도도 내었고요. 그런데 뒷심이 부족한 걸까요. 함께 오르던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조금씩 더 뒤처지더라고요. 나만 힘든가. 차마 기다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따라갔어요. 어느 순간 그들의 발이 제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한편으로는 혼자 뒤처진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어요. 앞에 걸어갈 때 나의 속도와 친구의 속도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어차피 길은 하나이고 올라가면 만나겠지요. 이제야 비로소 제 속도대로 갈 수 있겠어요.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네요. 이 고요한 산속에서 저와의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 거죠.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을까? 아니, 꼭 해내야만 하나?'


   한 손으로는 계단 옆에 설치된 밧줄 난간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등산스틱에 의지해서 계단을 오르는데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요. 이렇게 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계단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우선 잠시 뒤돌아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어요. 눈앞에 펼쳐진 산 아래 경치는 정말 멋있네요. 근데 지금은 저 광경을 즐기지 못하겠어요. 내려올 때 두 눈에 잔뜩 담으리라 다짐하고 다시 힘을 내어봐요. 끙차.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지요. 아니, 사실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못 오르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니까요. 아쉬움이 남으면 다음에 더 뜻깊게 도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한 번 해보기로 해요. 난간을 잡지 않아요. 스틱에도 의지하지 않아요. 그 어디에도 내 몸을 의지하지 않아요. 스틱은 뒤로 뒷짐 지듯이 양손으로 잡아 균형을 맞추었어요. 이미 종아리가 딴딴해졌지만, 계단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무릎을 쫙 펴서 종아리 스트레칭을 하듯이 올라요. 이 계단을 다 오르겠다는 생각 없이 몸 구석구석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며 발을 내디뎌요. 그동안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사용하던 몸을 내가 스스로 조절한다는 느낌에 묘한 쾌감이 올라오네요. 내 몸은 내 것이다.


   예전에 트레킹을 할 때, 현지 가이드가 해준 말이 생각났어요. '너무 힘이 들 때에는 저 위를 절대 보지 말아라. 내가 오를 계단만을 바라보고 걸어라. 그러다 보면 다 오를 수 있다. 위를 보면 그 높이에 압도당해 오히려 더 힘이 든다.' 이 말은 잊히지 않아요. 인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표를 너무 높이 세우지 말고, 내 앞에 주어진 과제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 경지에 오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죠. 암튼, 그 말이 지금 딱 필요해요. 저는 저 위에 있는 백록담에 오르겠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앞에 주어진 계단 한 칸을 오르는 데 구석구석 저의 모든 힘을 모아야 해요.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주저앉고 말 거예요. 그렇게 내 몸의 움직임을 온전히 느끼며 걷는데 저기 벤치에 친구가 웃으며 반겨주네요. 기다렸다고요.


   친구와 다시 함께 올라요. 하지만 친구를 무리해서 따라가지는 않아요. 금세 저는 다시 뒤처지는군요. 괜찮아요. 이게 제 속도인가 봐요. 다시 친구가 시야에서 사라져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하산하시는 분들이 힘내라며 응원의 말을 건네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화답하며 저는 다시 등산스틱을 뒤로 잡고 제 몸의 균형을 맞춰요. 향 구석구석을 음미해서 커피를 마시듯 천천히 제 몸을 감싸고도는 바람, 풀 소리와 함께 공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근육의 미세한 떨림을 느껴요. 이미 충분히 힘든데 없는 힘을 짜내어 올라가야 하는 정상 언저리 즈음, 수분이 빠져 드러난 근육을 마주하듯 몸 구석구석 느껴지는 고통을 맞이해요. 내 몸을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위해 괴로움을 이겨내는 데에 집중해요. 이번 등산의 하이라이트는 여기에서였어요. 정상을 눈앞에 두고 가장 힘이 빠지던 순간, 내 몸 밑바닥까지 구석구석 집중해야만 하던 찰나 말이에요. 내 한 몸뚱이 스스로 가누는 근육의 떨림을 마주하니 비로소 내가 나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때의 감각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도톨도톨 올라와요. 그 잔상이 잊히지 않아요. 이제는 팔팔한 20대가 아니죠. 아직 30대이긴 해도 곧 마흔을 맞이할 거예요. 마냥 젊은 청춘은 아니지요. 10년 전에 여기에 올랐다면 지금보다는 더 쉽게 올랐을 테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에만 환호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늙은 몸뚱이로 오를 때 볼 수 있는 길 위의 기쁨인지도요. 과정의 어려움을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이 조금 더 큰 것 같아요. 혹시 10년 후에 또다시 이곳에 온다면 또 다른 생각이 들겠지요. 아, 근데 지금 생각으로는 다시는 백록담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아요.


   올랐으니 다시 내려가야죠. 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구실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다시 내려올 건데 대체 왜 오르는 거지? 하지만 산은 오를 때도, 내려갈 때에도 매번 다른 인생길의 시나리오를 펼쳐서 보여줘요.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어요. 보통 등산에 5시간, 하산에 4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저희는 등산에도 하산에도 5시간이 꼬박 걸렸지 뭐예요. 올라갈 때 이미 체력을 다 소진한 상태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내려오려니 그것도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오를 때 쉬이 오른 길을 다시 내려오며 얼마나 감탄했는지요. '내려가기에도 어려운 이 길을 우리 어렵지 않게 올랐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 쉼터와 다음 쉼터의 거리가 이렇게 길었다고?' 구시렁거리는 저희 일행에 앞서 내려가시던 아저씨가 말씀하셔요. '산은 내려가는 게 더 어려워요. 내려가는 시간이 아주 짧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거의 비등해요. 그리고 올라갈 때 사고 안나, 내려갈 때 보통 사고가 나지. 신경 바짝 써요.'


   저는 아직 제 인생길에서 올라가는 중이고, 아마 곧 정상에 닿을 거예요. 20대만큼 수월하게 오르지는 않지만 인생의 위기에서 나 한 몸 다스릴 정도의 힘은 있는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정상에 올라 잠시 쉬고 나면 제 인생에서도 내려가야 하는 시기가 올 거예요.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는 것인데도 힘이 아주 많이 들겠지요. 오를 때보다 더 힘을 내야만 해요. 이미 다리는 무거워졌고, 지쳤지만 그렇다고 여기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문득 저는 쉽게 하는 것들을 어려워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같은 일을 함께 하고 있어도 저보다 훨씬 더 힘을 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니 코 끝이 찡해져서 훌쩍거렸어요. 우리가 아직 정상을 향해 힘을 내고 있는 중에, 우리 부모님은 죽음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힘을 내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계신지도요. 지금 할 수 있는 힘껏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길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마성의 시간을 견디고 견뎌 드디어 산 아래 발을 디뎌내었어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군요. 신랑이 환하게 맞아줘요.  아 반가운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사람. 내가 나 답게 살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 두고 기다려주는 사람. 내려오자마자 '신랑아 고마워. 나 산에 보내줘서 고마워. 나를 나 답게 살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하고 말하니, 잠시 멈칫,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 순간, 등산의 진정한 묘미는 여기에 있었군요. 오늘의 승자는 신랑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받는 이 사람.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저는 제 몸뚱이 이고 지고 해발 1980m를 올라서야 비로소 인생을 배우는군요.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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