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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Sep 16. 2022

feat. '낙이불음'의 자세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술 취한 기분은 싫어합니다. 술 취해서 하는 이야기도 싫게 여깁니다. 7080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김동률의 취중진담이라는 노래도 있지요. 네 저는 딱 질색합니다. 술 먹으면서 친해진다는 회사 동료들 있지요.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랑 친해져 봐야 뭐 없습니다. 꼭 참석해야 하는 회식 외에는 참여하지 않아 매번 거절하는 저에게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야 너는 그렇게 해서 사회생활 어떻게 하냐?' 덜 친한 사람이라면 '그러게요. 제가 좀 그렇죠?' 웃고 말지요. 조금 가깝다는 생각이 들면 조심스럽게 대답합니다. '저는, 술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는 커피 마시면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랑 점심 맛있는 거 드시러 가실래요? 아니면 커피 한잔이라도 좋아요.'


   20대에는 그래도 술과 함께 한 시간이 제법 있었어요. 한 때는 부어라 마셔라 했지요. 술 먹고 수업 땡땡이는 물론, 자주 가던 단골집도 있었고, 어두워야 술을 마시는 느낌이 난다던 친구와 낮에 만나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한 친구는 제게 늘 소주 반 병 정도 마신 채로 지내라 하더라고요. 그래야 좀 애가 부드러워진다나요. 회사에 들어가서도 처음부터 술자리를 피해 다녔을 리 있나요. 신입사원 때에는 이 자리 저 자리 끼어주시는 곳에 넙죽 참석했어요. 술 한잔 거나하게 들어가면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이 없어요. 엄청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반갑게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저만 달가워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평소랑 다름없이 냉랭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질없다고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빠질 수 없는 회식이 있었는데요. 저들끼리 술을 따르고 나누다 어느 순간 실장님이 소주 뚜껑에 술을 따라 코로 들이마시는 겁니다. 다들 환호하고요.


   그 순간 진짜 벌떡 일어나서 나왔어요. 안 본 눈 삽니다. 이건 저만의 회식자리 도망가는 방법인데요. 안 가고 싶지만 가야 하는 자리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가방을 사무실에 두고 퇴근합니다. 핸드폰과 카드만 주머니에 쏙 넣고 제일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가 흥이 오르기 시작하면 화장실에 가는 척 나옵니다. 인사 없이요. 어차피 저 사람들 어제 누가 있었는지도 몰라요.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술을 좋아하는데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건 뭐야.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 아니야? 의아하시죠. 저는 술이 들어가면 수많은 신경다발 중 한 올 끊어질 듯 말듯한 그 느낌이 싫더라고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느낌이 오는 그 순간은 좋지요. 헤벌쭉 웃기도 잘 웃고, 없는 애교도 좀 생기고요. 그런데 술이 깨서 실 한 오라기가 다시 팽팽해지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거북해요. 어쩌면 저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스물한 살의 더운 여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첫 차를 기다리며 친구랑 벤치에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어요. 옆으로 누워있었는데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웬 남자가 제 엉덩이에 손을 대기 직전이었어요. 화들짝 놀라 소리쳤어요.

뭐야 이 시벌롬.


   그때부터였을까요. 술의 위험성을 알게 된 것이. 그 이후로도 겁 없이 술을 마셔 재꼈지만, 이제는 술을 잘 마시지 않습니다. 마시더라도 취하기 바로 직전까지만 마셔요. 술이 취하는 것을 어떻게 아냐고요? 저는 술을 안 마신 듯할 정도로만 마십니다. 회식자리에서는 술을 못 하는 사람을 자처하고, 그래도 권하시면 팀장님께 취했다는 말을 남발합니다. '너는 눈 똑바로 뜨고 뭘 취했대.'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이지요. 덕분에 지금은 술을 잘 못 합니다. 2병 정도까지는 가뿐히 마셨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반 병도 못 마시는 정도로 주량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할지도요.


   그래도 스스로 기념해야 할 때는 술 한 잔 곁들여 자축의 시간을 갖습니다. 얼마 전, 분유를 먹지 않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짜내던 젖소의 삶을 마쳤습니다. 단유를 시작했지요. 연년생 2호의 돌을 마주하며 3년 만에 드디어 식이를 제한하던 삶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리라. 약도 맘껏, 맵고 짠 음식도 실컷, 술도 양껏 마시리라. 마침 친구 아버지가 손수 담가주신 아로니아 와인이 한 병 있군요. 기분을 내야 하는 날이니 예쁜 잔 꺼내고 안주도 멋스럽게 담아 한잔 마십니다. 어라? 생각보다 도수가 높군요. 더할 나위 없이 좋네요. 한동안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신랑이 맥주를 마실 때 탄산수로 아쉬움을 대신하던 저는 이제 없어요. 언제든 냉장고에 쟁여 둔 맥주 한 캔 딸깍 꺼내어 꼴깍꼴깍 마실 수 있겠군요. 와 너무 좋아요.


   네? 저 술 싫어하지 않냐고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술 좋아합니다. 많이 마시지 않을 뿐이에요. 저는 술을 맛으로 마십니다. 향이 좋고 특히 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해요. 맥주보다는 소주, 소주보다는 양주, 고량주도 물론 좋아하지요. 한 모금 딱 마셨을 때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 아시죠. 그 느낌에 환장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회사에는 비밀이에요. 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한다고 하면 주당이라고 생각해 버리더라고요. 시가 찬장에 아무도 마시지 않는 양주가 몇 병 있는데 이 그 갈색병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에요. 아 이것도 비밀이에요. 시가에서도 어머님이 술을 권하시면 정중히 사양하는 중입니다. 조신한 며느리 코스프레하는 중이거든요. 아무도 몰러, 며느리도 몰러.


   그러고 보니 저는 술 본연의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술로 인해 벌어지는 부수적인 것들 말고 본연의 향과 맛을요. 그리고 그 향과 맛은 한잔이면 충분합니다. 그건 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러겠지요. 그럴지도요. 그런데 저는 이 정도로도 좋아요. 누군가가 술을 권하는 것이 싫지 않을 때 빼지 않을 정도, 필요한 날 술 한잔 곁들일 수 있는 정도, 더운 날 청량한 맥주 한 캔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정도, 이 정도가 저에게는 딱인 것 같아요. *낙이불음의 자세로 말이에요.


*낙이불음(樂而不淫) :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는 뜻으로,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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