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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ul 23. 2024

만남의 광장? 만남의 버스!

 오늘은 고흥읍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고흥에 내려온지라, 아직 사무실이 세팅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업무 볼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녀야 한다. 서울처럼 생맥주가 펑펑 나오는 구독제 공유오피스는 바라지도 않으니, 시끄럽지 않으면서 와이파이가 되고, 편한 책걸상이 있는 곳이면 오케이다. 고흥에 있는 ‘투썸플레이스’가 카페 중에서도 시설이 썩 괜찮다.    

 

 꽤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지역도 겸사겸사 돌아보고, 사무실에 매이지 않으니 이게 바로 로컬에서 일하는 매력이지 않겠나. 지금은 직원숙소에 불편하게 얹혀살고 있다. 혹시 어디선가 잘 수 있는 곳이 생길 수 있으니, 옷가지, 세면도구 따위도 챙겨, 가방 두어 개를 바리바리 싼다.         


 버스정류장으로 나간다. 하지만 언제쯤 나가야 되는 건지 항상 애매하다. 서울처럼 휴대폰만 틀면 다음 버스가 어디쯤 있고, 정류장엔 언제쯤 도착할지 손쉽게 알 수 있으면 참 좋겠건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정류장에 부착된 버스시간표를 봐도, 기점에서 출발하는 시간과 종점에 도착하는 시간만 있다. 종점, 기점 사이에 끼어 있는 정류장에선 그냥 경험치로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밖에 없다.        


 여름이라 햇볕이 뜨겁다. 살짝 괴로워질 정도로 기다렸지만 버스는 도통 올 생각이 없다. 손부채질을 하다 문득 고령자들은 어떻게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건지 오지랖이 생긴다. 병원, 마트, 목욕탕 등 모두 읍에 집중되어 있는데, 운전도 못할 나이가 된 어르신들은 이런 힘겨운 길을 매번 감내하고 있는 걸까? 낯설게도 정류장 한구석에 선풍기가 매달려있다.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불현듯 선풍기처럼 낡아 있는 버스시간표가 과연 맞을까, 때늦은 고민도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좌)고흥에 처음 왔을 때 가방을 세 개씩 들고 다녔다. (우)버스정류장에 달려있는 선풍기와 농어촌버스 운영시간표.


 조금 더 기다려보니 어르신들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버스 도착 십여 분 전부터 주민들이 약속이라도 하신 듯이 한 분, 두 분 모이신다. 게다가 네 분 정도 모이니, 택시를 잡아 훌훌 떠나신다. 고흥읍까지 만 오천 원은 거뜬히 나오는 거리지만, 어르신들은 오백 원씩만 내면 ‘교통약자 바우처 택시’를 탈 수 있다.      


 등교 시간이라 중고등학생들도 보인다. 고등학생 한 명이 어떻게 봐도 여행자 꼴인 내가 신기한 듯 힐끗힐끗 곁눈질하다 이제 곧 버스가 올 시간이라고 넌지시 말을 건다. 버스에 올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번호도 교환한다. 한창 수능 준비 때문에 인스타를 하진 않는다 하지만, 상시적으로 편히 일상을 공유할 수 있게 맞팔도 제안해 본다.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연락하라, 언제든지 사주겠노라 했다. 말뿐인 호의에 보답이라도 하려는지, 학생은 나에게 고흥군 버스시간표는 이게 맞다며 접속링크를 알려줬다.     


 중고등학교도 읍에 몰려있는지라 정류장마다 학생들이 계속 올라탄다. 선후배 사이들이라 제법 깍듯하다. 어르신들도 계속 탄다. 간단한 인사말, 근황 소식들이 오간다. 어떤 노부부는 마대자루에다가 말린 고추를 한가득 담아 버스에 올랐다. 버스정류장은 ‘길두’, ‘호형’, ‘장수’처럼 마을이름을 차용하다 보니, 뒤에서 보고 있노라면 여기는 이쪽 마을 사람, 저기는 저쪽 마을 사람 등등 모여 다 같이 고흥읍으로 나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곳은 ‘만남의 광장’, 아니 ‘만남의 버스’다.     


 작은 마을버스지만, 모두가 넉넉히 착석할 만큼 승객이 적어 상당히 쾌적하다. 꽤나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다 보니 이따금씩 버스삼각손잡이들이 일제히 갸우뚱거린다. 양 창가로 연둣빛, 초록빛 풍경들이 뭉개지듯 지나가고, 버스 천장, 조그만 정사각형 모양의 뚜껑 틈새에서 바람 소리가 자맥질하듯 들려온다. 한참을 려 읍내로 들어온 버스는 곧 완행하며 사람들을 차례차례 내려주고, 종점인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위) 출근길 버스 창가로 보이는 해창만과 (아래) 오도 갯벌.


 종점 앞에서 습관적으로 벨을 눌렀다. ‘빵’하는 경적소리가 나서 한 번 놀랐고, 나에게 몰리는 시선에 또 한 번 놀랐다. 그 조그만 운전석 거울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기색을 살피시는 기사님의 눈길이 보인다. 당황감을 감추지 못하며 죄송하다고 하자, 주변 어르신들이 여기 처음 왔구나 하시면서, 호의적인 미소를 보내주신다. 그 당황이 무색할 정도로 버스는 별일 없이 종점에 다다랐고, 나는 하차하면서 고추포대기를 대신 들어드렸다.


고흥 읍내버스는 승객들이 조용히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이웃과 일상의 소식을 주고받는 만남의 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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