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태어나 십 대를 보내고, 이십 대 언저리, 강원도 해안가 어딘가에 갇혀 초소경계를 섰다. 지금은 고흥 섬마을에서 삼십 대를 한 걸음씩 보내고 있다. 가장 순수했을 때, 가장 힘들 때, 가장 나이 들었을 때를 바닷가에서 보내는 셈이니, 그야말로 바다는 내 인생에서 꽤나 농밀한 경험들이 펼쳐지는 무대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바다’하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하셨는데, 어린 나와 동생을 데려가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몇 차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형제는 점점 머리가 커져갔고, 끝내 아버지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촌극은 결국 막을 내렸다. 식용으로도 못쓸 복어를 가지고 놀던 재미로 아버지를 따라다녔다가, 한 번 낚싯바늘에 손이 찔려 울음을 터트린 후 낚시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군인일 때 바닷가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해가 지기 전에 초소로 나가, 해가 뜨는 걸 보며 소초로 복귀하는 일정이 반복되는 곳이었는데, 한 번 초소로 나가면 여섯 시간은 바닷가만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다. 주황빛 탐조등 불빛을 반사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어둠 속에서 반복되는 철썩이는 소리, 그 안에서 후임과 함께 K-2를 한 자루씩 메고 우두커니 시간을 쏴 죽였다.
고흥에 내려와 바다와 얽히고 얽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만나며 바다의 이면을 보고 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통과해 오는 사람들의 삶과 어촌이라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근린사회를 배운다. 그러면서 고단한 인생을 버텨내는 법도 배운다. 유배처럼 느껴지는 고흥의 삶이지만, 한평생 ‘가난, 그리고 바다’와 함께 살아온 어르신들을 보며, 이곳에서의 경험이 훗날 커리어에, 그리고 서울에 두고 온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아득바득 버텨낸다.
마을어장에서 해루질을 하고 계신 오취마을 어르신들
다만, 안타깝게도 술이 늘었다. 어민들과 일을 할 때, 술을 안 마시기가 참 쉽지 않다. 퇴근 후 친구도 없고, 놀 거리도 없는 이곳에서, 술이 던지는 유혹은 참 강력하다. 테더링으로 OTT를 보면서 캔맥주를 홀짝이는 것 밖에 위안거리가 없다. 술을 한참 마시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돼서 요즘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몸을 쓰거나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래도 팔영산 적취봉 정상에서 마셨던 ‘수덕산생막걸리’는 잊을 수가 없다. 수덕산 물이 깨끗하다는 데에 착안한 고흥의 대표적인 막걸리다. 고흥합동주조장에서 3대에 거쳐 만들어지고 있으며, 병에는 사장님 이름인 것 같은 ‘SHIN·HO·SIK’과 ‘I LOVE 고흥^^’이 적혀있다. 고흥에선 유자가 특산품이라 유자를 활용한 탁주들이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더 사랑받는 게 바로 ‘수덕산생막걸리’이다. 딱 무난한 막걸리 맛에 탄산의 청량감이 돋보인다.
그날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사십 분 정도의 헐떡고개를 넘지 못해 퍼졌으니. 그래도 죽을 맛을 곱씹으며 꾸역꾸역 올라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 중 마지막 봉우리 정상에 섰다. 다도해, 해창만 간척지의 논, 그리고 아트 막 한 산들이 운치 있게 펼쳐졌다. 신선이라도 된 것 마냥 주저앉아 육포와 막걸리를 일행과 나눠마셨다. 수덕산생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라 한 컵 마시자마자 모든 고생이 단번에 보상됐다. 인생술맛이다.
팔영산은 한 번 올라가면 클라이밍 하듯이 여덟 봉을 다 찍게 된다. 그 어딘가에서 찍은 산행로.
이번에 같이 초소경계를 서게 된 일병 후임은 요새 선임들한테 ‘갈굼’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야 말년병장이라 이제 소대가 어떻게 굴러가든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간 쌓인 정이란 게 있었나 보다. 다신 오지 않을 그날이 왔기에 나는 잡기로 했다. 무슨 날이냐, 바로 초소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타이밍이다.
피서철이 되면 해안경계선에 있는 ‘아야진 해수욕장’이 개장한다. 저녁이 되면 서른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난전을 까게 되는데, 그때 주민들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병력은 어느 특정 구간에서 두돈반 차량을 타고 가까운 초소부터 차례차례 내리면서 작전에 투입된다. 그리고 간부는 가장 먼 초소를 찍고 걸어 돌아오며 철책을 점검한다. 그날, 나는 일병후임과 가장 가까운 초소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간부가 돌아오기 전에 난전으로 뛰어가 캔 맥주를 사 올 터였다.
간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방탄모와 K-2를 후임한테 던져두고 해수욕장으로 달렸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리 달려 난전 주인아주머니에게 나라사랑카드를 건네며 캔 맥주 두 개만 사겠다 했다. 아주머니는 당황하신 기색으로 술사면 안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급박한 나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바로 이해하셨다. 다만, 실로 낭패이게도 카드부스기가 없어 결제 자체가 불가능했을 뿐. 옆에서 술을 드시던 쌍팔년도의 군인아저씨들이 호쾌하게 웃으시며 작은 캔 맥주 두 캔을 방탄조끼에 넣어주셨다.
“그럼, 선임이 사 오라고 하면, 사 와야지.”
24년 개장을 준비하는 아야진해수욕장, 군복무시절에는 가장 큰 흰 박스 건물 밖에 없었다(출처 : 강원도민일보).
다시 내리 달려 초소로 복귀했다. 아직 간부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근처 덤불에다 캔맥주를 숨겼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실로 말년병장다운 용의주도함에 탄복스럽다. 간부가 지나간 후 우리는 각자 초소 안팎에서 맥주 한 캔 씩 조용히 홀짝이며 경계시간을 조금은 기분 좋게 견뎌냈다.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껴가며 마셨던 카스 355ml는 적취봉 막걸리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물론 후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솔직히 전혀 궁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