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재개발정비예정구역에서 해제된 지 어연 7년, 그리고 2019년 도시재생활성화 대상지로 선정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근동의 재개발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도시재생을 추진하던 주민들도 본인들이 하달된 서울시의 지침에 따라 바로 이곳에서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을 추진해보겠노라 강한 의지를 밝혔다.
주민당사자로서 민주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반신반의했다. 애초에 한양대 기숙사 증축을 투쟁으로 반대하면서 모인 사람들이기도 했고, 도시재생사업에서 그리 젠틀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오히려 걱정됐다. 정비사업에 으레 따르게 될, 분쟁과 강압이 더 교묘하게 변하진 않을까.
주민들이 스스로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의 시행사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을 때, 한 가닥 희망마저도 사라졌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영세하기 때문에, 분담금이 생기면 이곳에서 재개발은 어렵다. 그러므로 외부시행사에게 쓰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본인들이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논리였다. 분담금을 낼 수 없는 주민들이 모여 있지만, 재개발을 멈춘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을 알리기 위한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여태껏 열었던 설명회 중 가장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다. 솔직히 속으로 주민들의 뜨거운 열기에 놀랐다. 분명 노후하여가는 주거환경을 거주자가 체감할 수 있게 정비하고, 부동산을 개발해 자산을 증식하고자 하는 이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회문제가 그렇듯이 언제나 방법론의 문제다.
내용은 '2세대 도시재생 주민설명회'였지만 현수막으로 나간 이름은 '사근동재개발아파트 주민설명회'였다. 행사명, 대관장소 가지고, 행정과 주민끼리 신경전을 벌였다.
참여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눈에 밟혔지만, 나이든 여성어르신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녀들은 매우 열악한 주거환경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사할 돈도 마땅치 않았으니, 당연히 분담금은 없다. 그러나 자산을 늘리는데 관심이 아예 없진 않진 않다. 아니 솔직히 기대도 됐기에 이 나이 들어서 이사하면 뭐 하겠냐, 집만 가지고 있다가 자식한테 물려주겠다며, 믿을만한 이웃 따라 노쇠한 발걸음을 옮겼건만.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혹여나 서명이라도 요청할라 치면 극도로 경계심을 내비쳐야 했다.
흔치 않게 ‘질의응답’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명확한 정보는 무엇 하나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될 수 없다. 다만, 이웃 중 누군가는 같은 편이고, 누군가는 다른 편이라는 것만 뚜렷해진다. 흥미롭게도 상대편 진영의 배후에는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지역유지가 꼭 껴있어 권력지도까지 알기 쉽게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결국 그녀들은 쓰러져가는 집에서 점차 이웃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키우면서 살아갈 테다.
어쨌거나 정비사업은 결국 삽을 떠봐야 아는 법! 행정과 센터는 다른 대단지재개발 구역과 갈등에 휘말리지 않게 주의하며, 소규모주택정비 관리지역을 신청하고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을 암약하듯 지원했다. 그 놈의 형평성을 지키겠다고 행정은 주민과 끊임없이 신경전을 했고, 그 사이에서 소프트타겟(soft target)이 될까봐 두려웠던 센터는 몸을 사렸다. 그러면서 주민들 간의 분열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혼란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올 때 즈음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주민들에게 돈이 없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은 사업성이 없다는 것. 과연 사업성을 늘리기 위해 주민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너무나도 뻔하게도 여러 개의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을 묶어 하나의 사업처럼 추진했다. 사실 이 시점에선 대규모단지재개발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을 더 수월하게 쫒아낼 수 있게 된다. 소규모주택정비 관리지역이 대규모재개발 사업구역과 흡사해지는 이런 형태에 서울시는 ‘모아타운’, 정부는 ‘뉴:빌리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모아타운 1호 ‘강북구 번동’. 번외로, 기존 도시재생사업은 이번에 ‘휴먼타운 2.0’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좌)소규모주택정비관리지역, (우)소규모주택정비사업의 사업성 분석. 그리는 건 쉽다.
종종 건설업자들은 소규모 정비사업이 대규모 정비사업보다 주민협의가 되지 않아 더 힘들다고 얘기한다. 사람이 더 적은데 협의가 더 어렵다니 아리송하지 않은가. 확실한 건 자금에 대한 리스크를 지고 있는 건설사들에게 민주적이고 공동체적인 주민협의구조를 운영할 유인 따윈 거의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돈 없는 원주민’이 나간 자리에 ‘외지인의 돈’만 들어오는 ‘쇠퇴’없는 대규모단지재개발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이 강압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사람이나 할 생각이다.
주민들은 재개발구역을 지정하고 해제하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파편적인 삶을 선취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취는 수많은 폭력의 과정을 담보하고, 끝내 아파트 재개발을 ‘자기실현’한다. 섬뜩한 선취다. 위정자들은 통치의 관점에서 보존에서 개발로 도시재생의 기조를 바꾸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근린사회의 공동체성은 총체적(collateral)이고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받는다.
‘군사혁명’에서 ‘생활혁명’으로.
알고 계실지 모르겠다. 단지아파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마포아파트를 건설하며 국가에서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5·16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불렀고, 최초의 단지아파트 건설을 생활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둘은 명백히 연장선상에 위치했다. 공동체 파괴의 비가역성. 이것이야말로 근대화의 철로였던 셈이다. 근대성의 명암을 겪으면서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투기열풍이 (잠시) 잠잠해진 지금, 우리는 철로의 방향을 결정해왔던 전철수를 다시 성찰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