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군 섬마을 어르신 서른여 분을 모시고 충남 서산시로 선진지 견학을 가고 있던 담당자 버들은 큰 난관에 봉착했다. 출발하기 전 세운 계획은 그럴싸했다.목적지까지 354km.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기에 먼 거리라 판단한 나는 서산 전안면도에서 1박을 묵기로했다. 이곳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펼쳐지는 4성급 리조트가 있었다. 굴 철이 돌아오고 있었고, 조만간 박신 작업이 시작될 터였다.그전에 이곳에서 어르신들과 수준 높은 서비스를 향유해 보리라 생각했다. 인근엔 굴풍어제를 여는 간월암도 있었으니 구색도 좋았다.쉼과 여유! 좋은 사업 사례를 보기 위해 비록 먼 길을 떠나게 됐지만, 그만큼 이곳 어르신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안락한 휴양을 보내고 오리라!
사전답사도 성공적으로 마쳤겠다, 기획자로서 벌써부터 득의양양했다. 사실 동료들은 투어 위주가 아닌 휴양 위주의, 어떻게 보면 실험적인 방식의 선진지견학에 대해 이런저런 우려되는 지점들을 피드백해 줬다. 하지만 솔직히 잘 듣지 않았다. 작년 선진지 견학을 실험적으로 추진해 좋은 성과를 내본 적 있다는 자신감이 내겐 있었고, 바로 그 자신감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 시간 반을 내리 달려 도착한 첫 점심식사 자리에서 철저히 풍비박산 났다. 그 우둔함을 현장에나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첫 점심식사는 안면도식 해물칼국수였다. 분명 사전답사 때 먹어본 바,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해산물 푸짐하게 들어갔고, 국물도 특색 있고. 그런데 주민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내가 간과했던 건 고흥 섬마을 주민들은 입맛이 '박사'시라는 점. 매일매일 생생한 해산물들을 조달해 드시니, 안면도산 해물이 성에 안 찰 만 했다. 나 같은 범인(凡人)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였다. 식사 후 식당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계신 남성어르신들에게 여쭤보니 바로 일갈하신다.
“점심은 예산 문제로 값싼 해물칼국수였지만, 저녁은 안면도에서 제일 유명하고 가격이 훨씬 나가는 게국지 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게국지는 뭔 게국지여! 남도 사람은 게국지 안 먹어!”
그 말에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반 정도는 얼이 빠졌다. 동료들과의 논의끝에 저녁 메뉴를 삼겹살로 급히 바꾸기로 하고, 식당에 전화를 해 죄송하다 거듭 사과했다. 수화기 너머였지만 저절로 몸이 굽신굽신 거려졌다. 모시고 온 어르신들 몇 분이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으신 거 같아서 취소해야겠다는 궁색해 빠진 거짓말을 덧붙였다.이제 계획은 모래 위에 지은 성이었다. 나는 동료들이 주는 피드백을 반추할 여유조차 없었고, 그저 물에 빠진 스펀지처럼 흡수하기 바빴다. 간월암 방문이 취소되는 등 계획은 현장 상황에 따라 다소 변했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일어났다. 동선은 꼬였고, 어르신들은 계획보다 더 오래 걸으셨다.
(좌) 안면도자연휴양림을 걸으시는 마을 주민들과 (우) 얼이 빠진 담당실무자 버들의 모습이다.
뒤쳐져 걸으시던 최고령 할머니께서 에고, 에고, 곡소리를 내며 허리를 부여잡고 계신 모습을 봤을 땐 정말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리조트에서 나와 그 아름다운 해수욕장에 위치한 카페로 가는 십여 분, 잠깐의 산책길마저 부담스러웠다. 모래사장 뒤로 물이 밀려나 갯벌이 드러나고, 그 위로 석양이 드리워지는 순간은 분명 퍽이나 아름다웠는데, 띄엄띄엄 무리 지어 천천히 걸어가시는 어르신들의 행렬과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 장소, 시간까지 다 고민하면서 짠 계획이었건만, 카페가 해수욕장 가운데 있는 바람에 버스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들어올 수 있니 없니 버스기사님과 살짝 실랑이를 해봤지만, 사실 스스로 자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쉼과 여유.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모양새였지만, 리조트에서의 휴양만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저녁까지만 드시고, 시설 좋은 리조트로 돌아가셔서, 마음 맞는 주민 분들끼리 스파도 하시고, 야외 데크 공원에서 바비큐 하시며 술도 한잔 드시고, 리조트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군것질거리도 드시면서, 푹 쉬시길 바랐다. 물론 꽤 많은 예산을 투여한 조식도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을행사 때 우르르 떠먹는 출장 뷔페가 아니라, 베테랑 셰프들이 하나하나 정성 들여 차려 놓은 고급 뷔페식을, 아침 해변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으시도록 ‘준비’해보고 싶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계획대로 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삼겹살을 구워 드신 주민들은 근처 노래단란주점에서 댄스삼매경에 빠지셨고, 그 사이 리조트 시설들은 마감됐다. 마감되지 않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야외공원에서 잘 모르고 담뱃불을 붙인 어르신에게 새파랗게 젊은 직원이 무례하게 응대하거나, 연회장 매니저가 실수로 조식 좌석을 예약해놓지 않았음에도 모르쇠로 나와 주민들이 한참을 기다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홀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 건전한 분위기의 노래단란주점을 찾고, 바비큐를 대신할 치킨을 공수하고, 리조트본사에 전화해 직원들을 잡도리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이틀 차 오전에 있었던 선진지 견학 자체는매우 성공적이었다. 충분히 예상된 바였다. 먼 거리를 무리해서 올라온 보람이 분명 있었다. 다만, 다시 고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문제가 남았다. 안면도에서 서산으로 더 올라왔으니,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진심의 354km를 단박에 주파해야 했다. 속절없이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랐고,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춤판이 벌어졌다. 사실 운행 중 음주가무가 과태료 대상이라는 문구가 붉은 글씨로 운전석 한편에 떡하니 붙어 있었지만, 내 인생에서 본 가장 무색한 경고문이기 짝이 없었다.
선진지 견학 이틀 차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여러 버전의 트로트 메들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고, 버스 후미는 마치 클럽 같은 분위기로 변한다. 커튼을 쳐 어둑어둑한 공간, 붉은 LED 실내등 빛만이 흐릿하게 시계를 확보한다. 머리 바로 위에서 쿵쿵 쏟아지는 우퍼의 진동은 정신을 빼놓기에 충분하고, 주민들은 제대로 된 안주거리도 없이 종이컵에다 소주를 따라 마시며 취해간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판이 깔린다고자연스럽게 무대가 되는 건 아닌 법. 이장님, 어촌계장님이 분위기를 끌어올리고자 부단히 노력하신다. 돌면서 술을 권하고, 춤추고 싶어 하시는 여성어르신들을 복도로 꾀어내신다.
“이렇게 마을에서 나오면, 여자들이 즐거워야 하고, 근심이 없어야 해.”
어촌계장님이 행사 관리를 위해 앞 좌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소주 한 병과 종이컵을 들고 따라오라 하신다. 이번엔 아무래도 ‘술상무’ 역할까지도 해야 할 모양이다. 영 내키지 않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지만, 선진지 견학 첫날 차의 미스를 만회하겠다는 의지도 충만하다. 사실 주민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술이나 춤을 권유받기 싫은 여성어르신들은 잠자는 척을 하며 그 의사를 완곡히 전달하고 계셨고, 맨 뒷자리에 포진하신 남성어르신들은 피곤한 듯이 눈을 감고 계시거나, 당신들끼리 술잔을 나누고 계신다. 복도로 나와 춤을 추고 계시는 분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보아하니 아직은 눈치들을 보고 계시는 단계다. 이장님을 쫓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소량의 술을 따르고, 나도 춤판에 합류한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싶어 마이크를 들고 한 곡 뽑는다. 살짝 당황스럽게도송출되고 있는 수십 개의 트로트 메들리 중에 아는 노래가 딱 두 개라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내질렀다. 사실 이렇게 까지 했다, 나는 할 거 다 했다는 느낌으로 자리에 돌아가기 위함이기도 했다. 분위기는 두말할 것 없이 달아올랐다. 마이크를 잡자마자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쏟아진다. 뒤에 무심히 계시던 남성 어르신들도 깜짝 놀란 듯 입 꼬리를 올리신다. 잘했다는 눈초리다. 이제부터 춤판은 본격적이다. 나는 조금만 더 바람을 잡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면 될 터였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한 여성어르신이 우스꽝스러운 춤사위로 끼를 발산한다. 주변 여성어르신들이 깔깔 거리며 웃으신다. 그리고 갑자기 벌어지는 일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얼떨떨해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누군가는 그녀의 거칠고 메마른 볼에 립스틱으로 연지곤지를 찍고, 또 누군가는 휴지를 가져와 콧구멍 하나를 막는다. 어디서 우르르 손수건들을 모아 와 두건을 만들어 씌어주기까지 한다. '각설이'가 탄생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우리 사무실 뒷집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이었는데, 분명 남편 분께서 동네에서 한 목소리 하시는 분이시라,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맥락인 건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이중에서도 나이가 어리신 편이실까.
여성어르신들이 신명 나게 춤을 추신다. 점점 율동은 커지고, 추임새는 요란스러워진다. 점잖은 표정이었던 어르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드신다. 그 와중에도 여성어르신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설이 역할을 맡은 그녀를 춤판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같이 웃으며, 같이 우스워진다. 어떻게 보면 같이 한을 푸는 거 같기도 하다.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이장님, 어촌계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남성어르신들은 여전히 눈을 곰곰이 감은 채 뒷자리에 앉아계신다. 그곳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생각이신 걸까. 무대 위아래에는 미안함과 애잔함이 뒤섞인 명암 차가 있다. '염치'라는 보이지 않는 무대커튼이 그 사이에드리워져있다. 당연히 나로선 자리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어르신들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나와 꼬깃꼬깃 접히더니 각설이 어르신이 쓴 두건에 하나하나 매인다. 모두가 한 장씩은 내어놓으니 어느새 스무 장 남짓 되어 보이는 지폐들이 머리 위에 주렁주렁 달려 흔들린다. 남성어르신들도 돈을 모아 버스기사에게 줄 봉투를 만든다. 나는 실소가 나오고야 말았다. 4성급리조트의 번듯한 시설과 훌륭한 스파, 아름다운 해수욕장의 야외 데크 공원,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과 바, 지갑을 제발 열어 달라 혼신의 힘을 다해 애원했던 계획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들은 무언가 소비하기 위해 돈을 쓰는데 엄격하면서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돈을 쓰는데 헤프다.그렇게 버스는 고흥에 도착할 때까지 들썩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돈도 마을을 위해 쓰라고 이장님께 기부하셨단다.
춤판이 벌어지기 전, 버스 안 풍경, 후에 벌어졌던 일은 눈 딱 감고 픽션으로 들어주시길 바란다.
“워어어이! 워잇!”
어느 때와 다를 거 없는 사무실. 하지만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다. 바로 지근거리에서 난 소리로 동물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데 들어본 적 없이 생소하다. 결국 동료들이 창문으로 달려가 두리번두리번 밖을 살핀다. 그러더니 이윽고 뒷집 마루에 앉아계신 어르신과 눈을 마주치고 아! 함께 겸연쩍게 웃는다. 마당 텃밭에 날아드는 참새들을 쫒기 위해 어르신께서 내시던 소리였던 것이다.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새를 쫓는 소리를 찾기 위해 마루에서 여러 소리를 내보려 하는 건 분명 아티스트의 기질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