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17 계절이 바뀌는 소리
회의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나를 감쌌다.
팀장은 이미 발표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 성과는 좋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노트북을 켰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린이집.
심장이 철렁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나섰다. 모든 팀원들의 시선이 다 내 머리통으로 쏠리는 기분이었지만, 어린이집 전화는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네, 선생님.”
“어머니, 아이 바지가 짧아요. 옷이 얇아서… 겨울인데 조금 걱정돼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옷… 맞다. 계절이 바뀌었지.’
겨울이 왔다.
하지만 내 옷장은 아직 가을에 머물러 있었다. 내 옷은 대충 입고 다니는데, 그만큼 신경을 못 썼다.
하지만 지금은 회의 중이다. 잠깐 밖에 나와 있는 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오늘 저녁에 챙길게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들어가자, 팀장이 허공에다 얘기하듯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애 키우는 사람은 힘들지. 겨울 준비도 못 하고.”
그 말이 내 귀를 찔렀다. '다 들리거든 이 새끼야.' (내면의 목소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따옴표 추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고서, 메일, KPI… 다 채워야 해. 그래야 눈치라도 덜 보지.’
팀장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다음 주 워크숍 참석 가능하죠?”
나는 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있어서…”
그 순간,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음… 알겠습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무언의 압박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퇴근 후, 나는 옷장을 열었다.
작아진 옷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바지, 티셔츠, 내의, 양말, 팬티…
모두 작아졌다.
‘이걸 다 정리해야 해. 내일은 쇼핑도 해야 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겨울 바지 사기
두꺼운 내의 준비
양말, 팬티 새로 사기
코트 세탁
지난 계절 옷 정리
그 리스트는 끝이 없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데, 왜 이렇게 많은 일과 돈이 필요한 거지?’
나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집에서는 또 다른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다.
기획가사노동.
그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놀자!”
나는 웃었다. 억지로.
“잠깐만, 옷 좀 정리하고.”
아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엄마는 왜 맨날 바빠?”
그 말에 심장이 찢어졌다.
‘왜 맨날 바쁘냐고?
엄마가 네 옷을 챙기고, 네 밥을 챙기고, 네 미래를 챙기느라 바쁜 거야.’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안았다.
“미안해. 엄마가 조금만 더 힘낼게.”
밤이 깊었다.
나는 옷장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아이의 성장은 기적이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부담으로 다가올까?
옷을 계절별로 정리하고, 버리고, 새로 사고…
이게 다 내 몫이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버텨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었어.
아이를 키우면서도, 내 커리어를 지키고 싶었어.’
하지만 세상은 내게 말했다.
“둘 다는 어렵다.”
옷장을 닫고, 나는 아이 옆에 누웠다.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내일은 놀아줄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그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승진의 문은 닫혔지만,
내가 열어야 할 문은 집에 있었다.
그 문을 열면, 아이가 웃으며 달려올 것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괜찮아. 오늘도 버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