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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 Nov 22. 2024

존중받지 못한 남자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7화

창화가 회사를 나오고 서울을 떠나 집으로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창화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의 기억은 참 얄궂게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의 길이가 훨씬 길고 그 강도도 강하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 망각의 동물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한다면 좋은 기억은 금방 옅어지지만, 나쁜 기억은 망각은커녕 점점 더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잔인한 것은, 이 나쁜 기억들은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누가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때때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며 주기적으로 사람을 들쑤신다는 사실이다.


무던해 보이는 창화도 매일같이, 시시각각 이런 기억들과 투쟁하고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자신을 급습해 오면, 그 기억과 사투를 벌이다 끝끝내 그것들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렇게 사투가 끝난 줄 알고 돌아서면, 그 기억은 다시금 절벽을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갈고리처럼 창화의 발목을 낚아채며 절벽으로 끌어당겼다. 창화는 기억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지면서 점점 지쳐갔다.


창화는 알고 싶었다. 이 기억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다음 영원히, 다시는 못 기어 올라오도록 뚜껑이라도 닫을 수 있는 방법을. 영원히 깊고도 깊은 절벽 아래에 머물게 만들 수 없다면, 그저 그것들이 올라올 때마다 억누르고 감당할 수 있도록 뚜껑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창화는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해 보았다.   

       

“최 부장, 아니 경식이… 너 지금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상무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상무님도 아시잖아요? 창화가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어쩌면 저보다 창화가 더 애사심도 강하고 능력도 좋아요.”

엄 상무는 자기 방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오른쪽에 소파에 앉아있는 경식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아까보다 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최경식 부장. 여기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봤자 일 터지면 누군가 책임져야 하는 게 회사야. 안 그래?”

뭔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면, 경식을 ‘최경식 부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엄 상무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창화는 아니…”

“그럼? 최경식 부장, 네가 책임질래?”

엄 상무는 칼날같은 금테 안경을 고쳐쓰며 눈빛으로 경식을 베어 버릴 기세였다.

“……”

“야, 인마. 최경식! 너도 이제 부장인데 좀 더 멀리 봐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예전처럼 일만 열심히 할래? 너는 인마, 우리 회사의 중심이자, 핵심인 공채야. 우리 동문 후배이기도 하고! 너도 알겠지만, 넌 그냥 시키는 거만 잘해도 임원은 떼 놓은 당상이야! 나도 나지만, 우리 회사는 대부분 우리 동문 선배님들이 꽉 잡고 있잖아? 그러니까…”

“선배님. 저 창화랑 이 회사에서 같이 뛰고 구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선배님, 제발 부탁드리는데 창화는…”

경식은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아 엄 상무를 바라보며 간곡한 눈빛으로 얘기했다.

“야 이 새끼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엄 상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식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면 되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야 인마, 부장달고 있으니까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냐?”

엄 상무는 다시 쇼파에 털썩 앉아 갑갑했는지 넥타이를 풀며 말을 이어갔다.

“후… 최경식, 네 위치 망각하지 말자. 그리고 이 새끼야, 내가 다 너 생각해서 이러는 거 아냐! 어차피 창화는 우리랑 달라. 애초부터 우리 회사에 들어 오지도 못할 놈을 내가 왜 뽑았겠어? 이럴 때 쓰려고 뽑은거야. 비상사태에 쓰려고 말이야.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야겠냐? 안 그랬으면 그런 놈은 우리 회사 문턱에도 못 와봐!”

대체 이게, 어딜봐서,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다는 건지 동의할 수 없는 경식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엄 상무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제 내 얘기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해. 창화는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함구하도록 하고. 만약 이게 새어 나가면… 경식이 너도 어떻게 될지 몰라. 그리고 인마. 너랑 창화는 출신이, 신분이 다르다고! 어디 자꾸 같이 엮이려고 그래?”

출신과 신분이 다른 사람. 경식은 창화를 단 한 번도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누가봐도 비인간적인 처사이기에 양심에 바늘이 수십 개는 꽂히는 기분이었다. 




경식은 사실 아까부터‘이건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오?’라는 말이 혀끝을 건드렸지만, 가까스로 삼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경식은 엄 상무의 방을 나오면서부터 창화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창화는 대기발령 통보를 받아 노트북도 없는 빈 책상으로 출근했다. 창화는 참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주지 하려 않았고, 그 누구도 정차하지 않았다.

“그러게 우창화씨, 왜 그런 실수를 해요?”

엄 상무는 마치 창화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씨’라는 호칭을 붙였고, ‘요’라는 존칭도 붙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창화씨가 책임이 커요. 알죠? 회사에서 내린 결정이니까 잘 따라주세요.”

엄 상무는 쇼파에 기대어 안 그래도 부풀어 있는 배를 더 내밀고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저… 상무님, 그래도 소명할 기회는 한번…”

“소명이라뇨? 무슨 소명? 실수를 했으면 인정할 줄 알고,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죠. 안 그래요?”

“상무님, 제가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 그만. 우창화씨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인사팀에 가서 하세요. 난 아무 권한 없어. 알잖아요? 나한테 백날 얘기해봐야 달라지는 거 없어요.”


하루 종일 빈 책상에 앉아 있던 창화는 결국, 인사팀과 합의하여 권고 사직 처리가 됐다. 인사 팀장은 보상금이라도 받게 해주는 걸 감사하라며, 마치 자기가 마음을 써 주는 것인 양 생색을 냈다. 창화가 홀로 빈 책상을 지키고 있는 하루 동안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엄 상무가 이미 사람들에게 창화와 말하지 말 것을 경고한 탓이였다. 그렇게 모든 책임을 떠 안은 채, 창화는 회사를 떠났다. 일이라는 게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 일이 뒤 틀리면 책임은 한 사람이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 이상한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 그 자리를 물러나는 것이라는 거다. 엄밀히 따지자면, 책임을 지는 것은 그 일을 끝까지 해결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책임지는 것과 떠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에도 빈번히 대입되며 같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았다.

창화는 회사 입구를 나오면서 의외로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사람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고, 되려 보상이라도 받고 나올 수 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창화야… 내가 너무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요 며칠, 네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경식은 창화와 자주 가던 회사 근처 포차에서 흥건히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창화에게 울먹였다.

“경식아, 난 너한테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나… 일찌감치 회사 떠났어. 이 사막 같은 회사에 너라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지금까지 버텼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런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회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그래! 회사가 다 이렇게 개 같지! 그래서 나도 나중에 엄 상무처럼 개 같은 인간 될까 봐 겁난다! 나도… 이제 이런 인간들이랑 그만 좀 하고 싶어!”

경식은 소주를 연발로 들이키며,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경식아,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라. 나 같은 인간은 절벽에 매달려 버티고 있어 봐야, 내 손가락 하나둘씩 떼어내며 절벽으로 떨어지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천지지만, 넌 손 내밀어 줄 사람들이 많잖아.”

창화는 소주잔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기울이며 흔들리는 소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젠장! 대체 나는! 우리는! 언제까지 버티고만 있어야 하냐? 왜 우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어야 하는 거냐?”

경식은 혼자 씩씩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야 인마, 넌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라도 있지…”

창화는 들고 있던 소주잔을 혼자 비우며 혼잣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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