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5화
창화와 미정의 대화는 어쩌면 기차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연히 시작된 이 대화가 벌써 대전까지 왔으니까.
“이번에 내리실 역은 대전, 대전역입니다.”
둘의 대화가 잠시 끊겼을 즈음 차내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어머, 벌써 대전이네. 다른 때보다 빨리 온 느낌이네요.”
미정은 기차 위쪽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미정 씨, 집에 좀 더 빨리 가려면 KTX를 먼저 타고 환승하면 되지 않아요?”
“아, 전 환승을 별로 안 좋아해요. 갈아탈 바에야, 천천히 가더라도 한 번에 가는 게 더 좋거든요.”
미정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불현듯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거 제 성격인가 봐요. 회사도 쉽게 환승을 못 했거든요. 여기가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그만두지도, 이직도 못 했어요.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봐 현주도 안 보고 그냥 와 버린 거예요. 참… 그러고 보니 그렇네. 미련한 성격이네요, 저. 일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미정은‘연애’라는 단어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것에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창화는 미정의 이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치면… 제가 더 미련하죠. 전 환승도 필요 없이 빨리 갈 수 있는데 이 기차를 탔잖아요.”
창화는 미정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둘은, 지금까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미정 씨는 얼마나 더 가면 돼요? 저야… 종점이라, 도착 시각 확인도 안 했거든요.”
“음… 이제 막 대전 지났으니까 한 세 시간 정도만 가면 될 거 같아요. 근데 창화 씨도 저랑 비슷할 거예요. 삼랑진역에서 부산역이 제 기억으로는 30분? 그 정도거든요.”
“그것밖에 안 걸려요? 삼랑진이 엄청 가까운 곳에 있었네요. 그런데 전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요.”
“훗, 창화 씨만 그런 거 아니에요.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은 삼랑진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어떤 곳인지 모를 거예요. 그야말로 그냥 작은 촌 동네니까요. 저도 아마 그 동네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죠.”
‘평생 모르고 살았어야 하는 일,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살았어야 하는 사람.’
창화는 불현듯 모르고 살았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냐하면, 창화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의 시작이, 몰랐어야 하는 것들, 알아도 모른 척했어야 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창화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네, 엄마.”
“내려오고 있니? 어디쯤이야?”
“이제 대전 지났어요.”
“몇 시에 도착해?”
“6시 넘어서요. 저녁은 아버지랑 먼저 드세요.”
“느이 아버지랑 너 태우러 가려고 그래.”
“아니에요.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저녁 드시고 그냥 쉬고 계세요.”
“에이, 그래도 우리 아들 오랜만에 휴가받아서 집에 온다는데 마중 나가야지.”
“괜찮아요. 어차피 짐도 없어요. 제가 알아서 갈 테니까 나오지 마세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와.”
“네.”
창화는 전화를 끊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까 경식과의 통화가 미정에게 들릴 정도로, 수화기 볼륨이 크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통화 내용이, 엄마와의 대화가 미정에게도 들렸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한테 휴가라고 말씀드렸어요. 괜히 걱정하실까 봐.”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잘하셨어요.”
미정은 마치 창화의 부모님이 가까이에 있는 것 마냥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평생 공무원 하다가 퇴직하셨고 엄마는 평생 저만 바라보셨어요.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면서 아빠는 아버지가 되는데 엄마는 나이가 들어도 엄마예요. 사실 회사 그만뒀다는 얘기를 빨리 드리기 싫어서,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서 늦게 집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요.”
창화의 말끝이 풍선 바람 빠지듯 힘이 쭉 빠지며 흐릿해졌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창화 씨도 사투리를 안 쓰네요? 전 서울 살면서 억지로 사투리를 고쳤거든요. 창화 씨도 사투리 고친 거예요?”
“아, 아뇨. 부산에 있을 땐 저도 사투리 써요. 사실 부모님은 고향이 부산이 아니에요. 아버지는 제주도 분이신데 고등학교 때 부산으로 유학을 오셔서 그 후로 쭉 부산에서 살게 되셨고, 엄마는 고향이 조치원인데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오시게 됐대요. 그리고 두 분이 부산에서 만나 쭉 사시게 된 거죠. 그래서 집 안에서는 항상 표준어를 듣고 집 밖에서는 항상 사투리를 들어서 둘 다 할 수 있게 됐어요.”
“와… 식구들이 전국구 같아요! 우리 집은 다 완벽한 삼랑진 패밀리라 사투리가 좀 심해요. 저는 서울 살면서 많이 고쳤는데 우리 식구들은 그냥 딱 경상도예요.”
미정은 창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편한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집은 어디냐, 무슨 일을 하냐,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냐. 이따위 질문을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대화. 이런 대화에 목말라 있었다. 타인이 나에게 물어보면 더 얘기하기 싫어지는 것들. 그런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이 대화의 찰나가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미정 씨, 원래 무궁화호는 이렇게 자주 서요? 사실 전 서울에서 부산 갈 때 무궁화호를 타는 게 처음이거든요.”
“그럼요. 삼랑진역같은 작은 역까지 다 서니까요. 그나마 삼랑진역이 계속 있어 줘서 다행이에요. 요즘은 삼랑진역 같은 간이역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삼랑진역이… 사람보다 낫네요.”
“네? 왜요?”
미정이 쌍커풀 접힌 큼지막한 눈으로 창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그 사람들을 위해 꿋꿋히 버텨주고 있잖아요. 존중...받는 기분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감정 이입이 되는지 창화는 미미한 미소를 보였다. 미정은 창화의 말 중 ‘존중’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레 특별한 단어로 들렸다.
“창화씨, 그럼… 삼랑진역이 있으니까 무궁화호가 서주는 걸까요? 아니면 무궁화호가 다니니까 삼랑진역이 있어 주는 걸까요?”
예상치 못한 미정의 질문에 창화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그건…”
마치 미정은 이 모퉁이를 돌면 뭔가 또 새로운 것이 나올 거라 기대하는 아이처험 창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누가 누구를 존중해주고 있는 건지… 답을 찾고 싶은 질문이네요.”
답을 내지 못한 창화의 대답에 살짝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사실 미정은 이미 창화와의 대화에서 많은 부분들을 공감하고 있었다.
“창화 씨, 혹시 전공이 국문학이나 뭐 이런 쪽이에요?”
“아뇨. 저 행정학과예요.”
“네?? 의외네요.”
“왜요?”
“창화 씨랑 대화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좀 있었거든요. 창화 씨 표현이 딱, 와 닿을 때가 몇 번 있었어요. 표현하는 게 보통 사람들보다 좋아서 국문학 같은 그런 말랑말랑한 전공일 것 같았어요.”
“그랬어요? 아버지가 평생 공무원으로 사신 분이라 저한테도 공무원 되라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대학 갈 때도 저는 전공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무조건 공무원 되는 데 도움 되는 학과로… 그땐 저도 딱히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거도 없어서, 그냥 공무원 되기에 도움 된다는 행정학과로 갔어요.”
“그런데, 왜 공무원 안 하셨어요?”
“고등학교 때는 몰랐는데 대학에 가고 보니까, 공무원 연봉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걸 보고 전 왜 아버지가 저한테 공무원, 공무원 하셨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머리가 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생활력이 엄청 강하셨다는 걸 알았죠. 그 박봉에 집도 사고, 저 대학도 보내시고… 실은 지금 집에 가면, 아버지랑 마주하는 게 제일 걱정이에요.”
“왜요?”
“제가 회사 나온 거 아시면 분명,‘거 봐라. 내 말 안 듣고 대기업, 대기업 하더니 결국 마흔 셋 밖에 안되서 회사 나오지 않냐. 내 말 듣고 공무원 했으면 네가 지금 이렇게 됐겠냐.’이러실 게 뻔해요. 제가 공무원 안 할 거라고 했을 때, 저랑 한바탕 크게 했었거든요. 제가 취직했을 때도 아버지는 실망이 크셨는지 잘했다, 축하한다, 이런 말씀도 안 하실 정도였어요.”
“창화 씨 그거 알아요?”
“네?”
“방금 나이 말씀하신 거.”
창화는 순간, 처진 눈꼬리를 들썩 하더니, 입을‘아!’하고 벌렸다.
“하하, 괜찮아요. 저랑 나이 비슷하겠는데요.”
“미정 씨랑요? 혹시… 동갑이에요?”
“음…. 전 노코멘트!”
기차의 정차가 잦은 것은 작은 역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부족해 보여도, 불필요해 보여도 모두 같은 역이기에 존중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잠깐 머물러준다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