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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 Nov 08. 2024

구멍 난 마음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3화

창화가 집에 얘기한 휴가 기간, 즉 회사를 나오게 됐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기간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창화는 이제 이 얘기를 부모님께 털어놔야 했다.

“너 좋아하는 갈치 조림했어. 얼른 나와서 먹어.”

저녁상을 차린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화는 마치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사람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가득 들고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 말없이 식사하셨고 엄마는 창화의 밥 위에 두툼한 갈치 한 토막을 올려주셨다.

“이제 휴가도 거의 다 끝났지? 오랜만에 길게 쉬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냥 이렇게 훌쩍 지나가 버려서 어째?”

엄마는 창화가 근 2주 동안 집에만 있는 게 안타까웠다.

“저 사실… 회사 나왔어요.”

갈치는 입에 갖다 대지도 않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며 뼈만 고르던 창화가 말했다. 그러자 깻잎을 집어 가져가던 아버지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다시 흰쌀밥을 덮었고 엄마는 아버지와 창화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보느라 전전긍긍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잘렸어요. 죄송해요. 밥상머리에서 이런 얘기 꺼내서.”

이 말을 꺼내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할 것 같았던 아버지는 의외로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조용한 저녁 식사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럼 뭐, 회사를 천년만년 다닐 생각이었냐? 남의 집에서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어차피 나와야 하는 거 좀 더 빨리 나온 거라 생각하고 좀 쉬어.”

아버지는 흰쌀밥을 다 비우시고 냉수를 한 잔 들이켜시더니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정말 의외였다. 그렇게 하라던 공무원 안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냐고 핀잔을 쏟으실 것 같던 아버지가 오히려 더 차분했다. 이런 아버지의 차분함을 마주하자 창화는 되려 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아버지 말씀이 맞아. 창화 너도 고생 많았어. 이제 좀 쉬고 천천히 생각해.”

엄마와 아버지. 두 분 모두가 창화보다 더 담담했고, 그 담담한 담벼락 사이에 끼어 창화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창화는 오후에 느꼈던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느낌을 저녁까지 이어가고 있었다.     

창화의 휴가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말을 하고 나니 아주 잠깐은 속이 시원했는데 그 시원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휴가가 아니기에 창화는 눈치만 더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이제 휴가가 아니기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됐는지, 아니면 정말 오랫동안 비워졌던 자신의 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창화는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었다. 먼지가 뿌옇게 낀 창틀도 닦고 창화가 상경한 이후로 아무에게도 손길을 타지 않은 책장에 줄지어 있는, 관상용이 되다 못해 색까지 바래 버린 책들을 죄다 꺼내 빈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지금은 뭐가 들어있는지조차 모르는 책상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탈탈 털어 비워냈다.

“뭐 필요한 거 없니? 도와줄까?

창화가 분주해 보였는지 엄마가 아래층에서 방 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금방 끝나요.”

창화의 집은 오래전에 지어진 2층 양옥집인데 창화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 시절에는 나름 고급스럽게 지어져 거실이 나무로 된 바닥이었고 창화의 방으로 올라가는 10개 남짓한 계단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당시 사춘기였던 창화는 1층에 있는 좀 더 큰 방을 택하지 않고 훨씬 작고 천장이 낮은 2층 방을 자기 방으로 만들었다. 이 방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큰 창문이 하나 있는데, 창화는 의자를 밟고 이 창문으로 나가 혼자 대청마루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었다.


창화는 대학교 때 잠깐 영화에 빠져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게 일종의 취미였고, 그 취미 때문에 방 벽면 곳곳에 얇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영화 포스터가 꽤 많이 걸려있었다. 방 정리가 대충 끝나고 둘러보니, 예전에는 보기 좋았던 영화 포스터들이 이제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같아 하나씩 들어내기 시작했다.

영화 포스터를 다 들어내자 포스터를 걸고 있던 못도 모습을 드러냈다. 포스터가 걸려있을 땐 눈에 띄지 않던 못. 포스터가 사라지자 못이 여기저기에 뿔처럼 솟아있었다. 창화는 아래층에서 펜치를 가져와 솟아난 못 들을 모조리 빼냈다.

“하… 이 구멍들은 어쩌지…”

밉살스러운 못을 다 빼내자 이번에는 얄궂은 못 자국 구멍들이 점처럼 남아, 못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인건 방에 있는 벽지가 흰색이라는 것이었다. 창화는 못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충진재를 사 와 구멍을 하나씩 채워 가기 시작했다. 충진재로 구멍을 메우자, 못 자국이 아까보다는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벽이나 사람 마음이나…”

못질을 당한 벽이나 사람 마음이나 박혀있던 못을 빼낸다 해도 상처는 남아있다. 아무리 그 상처를 덮고 메워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기 집 벽에 못 질을 하기 전이 사람 마음에 못 질을 하기 전보다 신중하다. 내 집, 내 공간에 혹시라도 작은 흠집이라도 남을 까봐 노심초사하지만, 남의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못을 박아 버린다.

창화는 군데군데 충진재 자국으로 때워진 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창화는 창문을 열고 옥상에 올라가 대청마루에 대자로 뻗어 눈을 감았다. 지금 창화의 마음은 눅눅하고 축축하게 젖어 곰팡이가 필 정도였다. 이렇게 질퍽거리는 마음을 햇볕에 싹 말려버릴 수만 있다면, 몇 날 며칠이라도 이렇게 누워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창화야, 내려와서 사과 먹어. 사과가 참 달아.”

창화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거실로 내려갔다.

“사과 맛있죠? 밀양 얼음골 사과예요.”

“어머… 얼음골 사과였구나. 어쩐지… 사과가 참 맛있더라. 정말 오랜만이네.”

엄마는 다시 사과를 들어 구석구석을 돌려보며 삐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밀양 얼음골 사과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어디 알다 뿐이겠어. 이 사과는 엄마한테 아주 특별해. 밀양도 그렇고. 엄마가 예전에 느이 아버지랑 놀러 간 적이 있거든. 거기가 무슨 절이더라… 돌이 땀을 흘린다고…”

“표흥사.”

창화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마치 퀴즈를 빨리 맞추려는 사람처럼 입안에 사과를 넣은 채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지만, 그걸 또 알아듣는 엄마였다.

“응! 맞어. 표충사. 그 절도 너무 좋았고, 얼음골 계곡도 참 시원하고 좋았어. 그러고 보니 벌써 오래전 일이네. 사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다 나네. 느이 아부지가 그때 엄마한테 거기 놀러 가자고 얼마나 매달리던지. 호호호!”

얼음골 사과를 보자, 옛 추억이 떠올랐는지 엄마는 앨범을 보는 것처럼 사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창화에게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엄마한테 놀러 가자고 졸라댔다는 사실이었다.

“느이 아버지가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래도 귀여운 구석도 있고 속정도 깊었어. 너 가졌을 때 그렇게 이 사과가 또 먹고 싶은 거 있지. 느이 아버지가 똑같은 사과로 사다 준다며, 밀양까지 가서 이 사과를 한 박스나 사 왔지 뭐야.”

“아버지가요??”

창화는 난생 처음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를 들으며 뜻밖의 아버지 모습에 연신 놀라, 포크를 든 채 마치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놀랬지? 그때 먹었던 얼음골 사과가 참 달았지. 너도 뱃속에서 맛있게 먹었고. 사과 맛도 맛이지만, 느이 아부지 마음이 더 달았지. 그래서 엄마한테는 그곳이 참 따뜻하고 달아.”

창화는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밀양과 삼랑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미정이 얘기해줬던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찾아보았고, 그 지역의 사진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더니, 창화는 삼랑진행 기차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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