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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한 여자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8화

by 오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건지 아니면 봄의 끝남을 알리는 건지 모르는 비가 미정의 동네를 적시고 있었다.

미정의 동네에는 성인의 키보다 조금 더 깊게 파이고 성인이 팔을 쭉 뻗고 누우면 반대편이 닿을 둥 말 둥 한 작은 하천이 하나 있다. 평소에는 물이 말라 있어 하천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가도, 이렇게 비가 내리면 물이 금세 차올라 하천의 본색을 되찾았다. 미정은 오랜만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싶어 우산을 쓰고 나와 하천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너는 좋겠다. 이렇게 비만 오면 다 아래로 떠내려 보낼 수 있으니까.”

미정은 힘차게 흐르는 하천을 넋 놓고 바라보며 말했다. 미정에게는 떠내려 보내고 싶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미정의 마음은 줄곧 가뭄이라 그 기억을 떠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 내가 이것밖에 안 돼. 정말 미안해, 미정아.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미정은 이렇게 이별했다. 아니 이별 당했다. 미정은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사랑은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이별은 일방의 결정이면 그만이라는 말에 미정도 동의해 왔기에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상황이 되자 온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비혼주의자였던 미정에게 결혼은 불편하고, 불필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존재였지만 그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다.


“오빠… 난 오빠만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오빠도 알겠지만 난 결혼 따위 꿈꿔 본 적도 없어. 오빠도 그랬고. 그런데 결국 오빠가 여기까지 날 끌고 왔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놔 버려?”

미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미정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전화기를 잡고 있는 손은 더 그랬다.

“미정아… 나도 너만큼 노력했어. 나도 중간에서 힘들었다고… 우리 서로 더 힘들게 하지 말자… 이만 끊을게. 잘… 지내.”

미정이 부여잡고 있던 인연은 그렇게 전화 한 통으로 끊어졌다. 그는 만나서 얘기하자는 미정의 말에 여기까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미정은 이별 규정에 있는 것처럼 일방의 통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미정은 오랜 시간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미정과 같은 비혼주의였던 그는 처음부터 미정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고,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미정은 그가 비혼주의라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에서 관심이 시작되었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그의 생각과 삶의 방향도 비슷한 면이 많아 더욱 좋아졌다. 하지만 가치관, 생각, 삶의 방향 이런 것들이 비슷하다고 다른 것도 비슷해질 수는 없었다.

자라온 환경, 살아온 배경, 주변의 풍경. 이런 것들은 애초부터 닮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도 닮아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정은 그와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이런 것들의 다름에서 오는 현기증을 느끼며,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미정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설득할 테니까 나 믿고 따라와 줘. 응? 우리 부모님 겉으로는 저렇게 하셔도 마음은 안 그래. 내가 잘 알아.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해 줘. 응?”

이렇게 미정은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기증을 느끼는 일들도 점점 잦아졌었다. 비혼주의자였던 미정이지만, 그와 오랜 연애를 하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며,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겨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미정의 현기증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 부모님은 뭘 하시고?”

“시골에서 농사지으세요.”

그러자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어머니는 마치 취조하는 형사처럼 질문을 이어갔다.

“대학은 어디 나왔어요?”

“창원에 있는 미진전문…”

“아, 엄마! 엄마는 초면에 무슨 그런 걸 물어봐요? 일단 밥 먼저 드세요.”

그는 황급히 대화를 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너한테 안 물었으니까 넌 가만있어. 그래, 대학은 어디라고요?”

“창원에 있는 미진전문대학교 졸업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부모님은 말이 없었다. 그는 이 분위기를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의 부모님은 물을 한 잔 마시고는 그대로 자리를 일어났다.


그때부터 미정과 그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의 관계를 탄탄하게 지탱해 줄 것만 같던 가치관, 생각, 방향의 같음은 결국 환경, 배경, 풍경의 다름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며 파편으로 흩어져 버렸다. 미정은 이때부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읍소와 설득에 넘어가 그 관계를 빨리 정리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미정이 창화와의 대화에서 어리석은 성격을 탓하며, 실패했던 연애사 얘기까지 뱉어낼 뻔해 급브레이크를 잡았던 이유다.

비혼주의였던 미정에게 그와의 이별은 많은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큰 상처였던 것은 그렇게 매달리며 설득을 거듭하던 그가 어느 날, 미정에게 전화로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한 것이었고, 그 후 한 계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여자와의 결혼 소식으로 미정을 배신감에 몸서리치게 만든 것이었다.


“그 새끼 그거 분명 바람 난 거야.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너랑 헤어지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하냐? 야, 강미정. 너 잘 헤어졌어. 그런 새끼인 줄 모르고 살았어 봐. 그게 더 헬이지.”

현주는 결혼 전부터 미정과 자주 가던 맥줏집에서 미정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3개월 만에 결혼하든, 3일 만에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헤어진 뒤에 있는 일인데…”

미정은 현주의 말에 내심 동의했지만,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고군분투했다.

“야! 그게 어떻게 같아! 엄연히 다르지. 너는 진짜 속도 좋다. 너 헤어진다고 결심할 때마다 난 대 찬성한 거 알지? 근데 또 다음 날 되면 다시 만나고… 너도 그 성격 좀 고쳐야 해. 우! 유! 부! 단!”

미정은 현주의 말이 듣기는 싫었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뭐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새끼. 너한테 뻔지르르한 약속은 또 얼마나 많이 했어? 내가 이렇게 할게, 저렇게 할게, 나만 믿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양 손가락 다 펴도 모자라. 너랑 만날 때도 보면 지가 한다는 거 제대로 지킨 적이 없어.”


미정은 철저히 존중받지 못했다. 사람으로부터, 회사로부터. 어쩌면 존중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섞일 수 없는 공간에 자신이 꾸역꾸역 들어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미정의 비혼주의는 더 확고해졌다. 머물 것 같았던 사람이 지나쳐 버리는 것도 싫지만,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다는 불안감도 생겼다. 이런 현기증을 느끼고 사느니, 그냥 혼자 사는 게 훨씬 낫다는 결론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러게… 차라리 약속이라도 하지 말지. 약속을 안 해주면 실망하지만, 약속을 안 지키면 이렇게 원망하게 되잖아…”


미정은 차오른 하천으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지며 쪼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2024년 12월 11일 출간

온라인 예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870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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