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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 Dec 03. 2024

야경같은 사람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10화

“이번에 내리실 역은 대구, 대구역입니다.”

차내 방송이 이번 역이 대구역이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대구역이에요. 이제 정말 다 와 가네요.”

창화는 창밖으로 보이는 대구역 표지판을 보며 말했다.

“이제 저는 한 시간, 창화 씨는 한 시간 반만 더 가면 되겠네요.”

“삼랑진역에서 집은 가까워요?”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 촌이다 보니까 대중교통이 잘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나오실 거예요.”

“삼랑진이 그렇게 촌이에요?”

“그럼요. 예전에 서울에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는 지역에 지하철이 없으면 촌이다.”

“음… 그런가? 그런 기준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근데 촌은 촌인데 되게 신기한 것도 있어요. 삼랑진에 있는 건 아니고… 밀양에 있지만, 표충사라는 절에 사람처럼 땀 흘리는 돌도 있고… 아 참! 삼랑진에 만어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에는 두드리면 종소리가 나는 돌이 엄청 많아요.”

“……지금 저 안 가봤다고 막 지어내는 거죠?”

“하하!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세상에 돌이 어떻게 땀을… 흘려요? 그리고 돌을 두드리는데, 어떻게 종소리가 나요? 그게 사실이면,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데 나와서 저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 같은데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미정은 창화가 얘기하는 동안 핸드폰을 검색하더니, 창화에게 당당하게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 이거 봐요. 표충사 땀 흘리는 돌. 그리고 이건 만어사 종소리 나는 돌.”

창화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사실이었다.

“와… 대박… 진짜네요? 이렇게 신기한 관광지가 있는데, 왜 전 지금까지 몰랐을까요?”

“다음에 밀양이랑 삼랑진 여행 꼭 가봐요. 가끔 이쪽에 여행 가봤다는 분들 얘기 들어보면 참 좋았대요. 사실 전 거기서 나고 자라서 큰 감흥이 없지만.”

창화는 마치 어릴 때 친한 친구와 뻥 치지 마라, 진짜다, 내기할래? 와 같이 말장난하는 것 같은 대화의 느낌을 받으며,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시간을 되돌려 모든 걸 바로 잡고 싶은 순간. 하지만 시간은 앞으로만 갈 수 있고 사람은 그 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야 할 뿐,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저는 백수니까, 언제 번 삼랑진에 가서 그 희한한 돌도 확인할 겸, 여행 가봐야겠어요.”

“그래도 부산이 훨씬 볼 것도, 먹을 것도, 할 것도 많죠. 부산도 안 가본지 참 오래됐네요. 저도 이제 백조니까 조만간 부산 한번 가봐야겠어요. 친구들도 만나고.”

둘은 이 대화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서로가 서로의 동네에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오면 연락하라고 하거나 갈 때 연락을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그걸 원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원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는 상태. 마치 발 언저리에 그어진 선 앞에서 이 선을 넘어도 될지, 넘어서는 안 될지 머무스러운 상태. 이 상태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밀양, 밀양역입니다.”

“이제 다음 역이 삼랑진역이예요.”

“미정 씨는 이제 도착이네요.”

“오늘 창화 씨 덕분에 재미있게 왔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일부러 늦게 가는 기차를 탔는데, 오히려 더 일찍 도착한 기분이에요.”

“정말 오랜만에 대화에 집중한 거 같아요. 기차라는 공간에서 딱 갇혀있으니까, 더 집중이 잘 된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대화가 정말 알찼어요.”

“저도 그래요. 실은 저… 요즘 대화를 거의 단절하다시피 지냈는데, 오늘 미정 씨랑 그동안 묵혔던 스피치 다 터뜨린 거 같아요. 아, 제가 짐 내려드릴게요.”

미정은 창화가 통로로 나올 수 있도록 먼저 일어섰다. 창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아!”

“어머, 창화씨 괜찮아요? 아프시겠다…”

미정은 두 손을 작은 입에 모으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창화가 일어서며 머리를 선반에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아야… 괘… 괜찮아요. 종종 있는 일이라…”

“그러고 보니, 아깐 몰랐는데 창화씨 키가 정말 크네요. 한… 185?”

“아… 네. 그 정도예요. 그래서 종종 이렇게 헤딩을 잘 해요.”

창화는 아픈 것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는지 귀가 빨개지며 미정의 짐 가방을 내려주었다.

“창화 씨, 오늘… 야경 같은 대화였어요.”

미정은 창화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네? 야경 같은… 대화요?”

“야경이 그렇잖아요. 야경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야경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비로소 야경의 아름다움이 보이죠. 쉽게 말하면…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대화여서 더 좋았다는 거예요. 사람도 그렇더라고요. 너무 가까워지는 것보다, 야경처럼 거리를 두고 있어야 더 좋은 사람.”

“아… 뭔가 시적인 표현인데요? 이럴 땐 미정 씨가 국문학과 같아요. 저도 좋았어요. 이‘야경 같은’대화. 조심해서 집에 잘 가요.”

창화는 미정과 악수하며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요. 창화 씨도 부산까지 잘 내려가세요.”

미정은 창화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짐 가방을 끌며 객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창화는 원래 자리이자 미정이 앉았던 통로 쪽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야경 같은 대화… 야경 같은 사람…”

미정은 기차에서 내렸지만 미정이 남긴 한 마디는 여전히 창화 옆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젊은이, 미안한데 이 짐 좀 올려주겠나?”

막 자리에 앉아 한낮의 야경을 감상 중인 창화 옆에서 백발의 노인이 큰 보따리를 들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 네! 이리 주세요.”

창화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일어나 노인의 보따리를 받아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고마우이.”

노인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창화의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인사는 건넸다. 삼랑진을 출발한 기차는 머지않아 부산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창화는 선반 위에 올려놨던 크로스 백을 내리려다 노인이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어르신?”

창화의 목소리를 들은 노인은 눈을 뜨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저… 이제 종점인 부산역이에요. 짐 내려드릴까요?”

노인은 창화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화는 선반 위에 있는 보따리를 내려 노인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가져다 놓았다.

“이거 하나 들게.”

보따리에서 사과 하나를 꺼낸 노인은 창화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고마워서 그러네. 내 지금 줄 게 이것뿐이야. 받아주게.”

“네… 그럼… 감사합니다.”

“참 좋은 청년이구먼. 그럼, 또 보세.”

“네? 아… 네… 어르신 안녕히 가세요.”     

집 근처에 도착하자, 창화는 당장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근처 공원 벤치에 잠깐 앉았다.

“와… 아까 미정씨가 준 사과만큼 다네. 오늘따라 사과 참 많이 먹는구나.”

기차에서 내릴 때 노인이 건네 준 사과를 씹으며 미정과의 대화도 함께 곱씹고 있었다.   

“하긴, 진짜 예쁜 야경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창화는 한결 가벼워진 듯한 마음으로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2024년 12월 11일 출간

온라인 예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870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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