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11화
미정과 나누었던 대화의 조각들이 완성될 즈음, 기차는 창화의 목적지에 다가가고 있었다.
“내리실 역은 삼랑진, 삼랑진역입니다.”
부산에서 삼랑진은 정말 단숨에 도착하는 거리였다. 부산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오히려 부산역에서 삼랑진역에 도착하는 시간이 더 짧을 정도였다. 창화는 가방에 넣어왔던 책을 읽을 겨를도 없이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에서 내리자 정말 단출한 간이역 플랫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플랫폼에 내리자, 삼랑진역 뒤편으로 빼곡하게 서있는 감나무들이 이파리를 흔들며 창화를 반겨주었다.
“아버지가 놀러 가자고 엄마한테 떼쓰실 만했네…”
젊은 아버지가 엄마에게 떼를 쓰는 모습이 다시 상상되며 창화는 풉!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삼랑진역에 있는 어느 누구도 뛰거나 빨리 걷지 않았고, 서두르거나 급한 기색이 없었다. 다들 천천히 기차에서 내려 서서히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창화도 기차에서 내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걸었다. 철길을 따라 있는 풍경도 살피고 평소에 돌아보지 않던 뒤도 돌아보며 사방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삼랑진역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창화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 광장에 빼곡히 심긴 벚나무와 소나무들로 인해 광장에 사람보다 나무가 많다는 것부터 마음에 든 창화는 잠시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삼랑진역과의 첫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겨우 삼랑진역에 도착했을 뿐인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 가득 차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삼랑진역이 한 권의 책이라면 창화는 당장이라도 사계절을 넘겨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랑진역 앞에는 딱 차 두 대가 왕복으로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도로가 있고, 도로 주변으로는 낮은 건물과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사람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높이까지만 짓도록 약속을 해놓은 것처럼 낮은 건물들. 그래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파란 하늘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벤치에만 앉아있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화는 이 찰나가 만족스러웠다. 아까는 들리지 않던 차 소리가 들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삼랑진역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창화는 천천히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역시!’
창화는 주차장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동네 뒷산 같은 눈으로 웃었다. 왜냐하면, 주차장 입구에 주차비 정산 게이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 대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서울이나 부산에서는 결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창화는 이 모습마저도 마음에 무척 들었다. 누구에게나 그냥 열려있는 삼랑진역 주차장마저 창화에게는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창화는 삼랑진역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이 지금의 이런 좋은 느낌과 감정도 사진처럼 담아 놨다가, 우울해질 때나 기분이 안 좋을 때 꺼내서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삼랑진은 내일 또 와도 되고 모레 다시 와도 되는 곳이었다. 굳이 오늘 많은 곳을 갈 필요도, 많은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삼랑진에 온 목적은 미정이 얘기했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집에 내려온 후로 줄곧 뭔가 해야 하거나, 어딘가 나가야 한다는 묵직한 부담이 창화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아무도 창화에게 잔소리하거나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가 이런 부담에 갇혀 도서관으로 나가거나 방 정리를 한 것이었다. 오늘, 이렇게 삼랑진으로 훌쩍 떠나온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서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뭔가 해야 한다는 체증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미정이 얘기했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삼랑진’이 머릿속에 맴돌아 큰 기대 없이 와 본 것이었다.
깊어진 겨울처럼 얼어있던 마음을, 젊은 시절의 엄마가 느꼈던 따뜻하고 달달함으로 녹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창화가 직접 와 본 삼랑진역은, 그리고 삼랑진은, 미정이 얘기한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었고, 이런 곳이 부산에서 40분 남짓의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는 그렇게 삼랑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창화는 그 후로 매일같이 삼랑진에 갔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마치 삼랑진에 만날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침부터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삼랑진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창화가 삼랑진에서 딱히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삼랑진역 주변을 걷다가, 또 앉았다가, 배가 고프면 끼니를 때우고, 좀 덥다 싶으면 삼랑진역 앞에 있는 밀양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이 반복적인 일상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삼랑진역 근처에는 창화가 온종일 머물기에 불편함이 없이 모든 것이 다 있다. 작은 식당이 있고, 작은 도넛 가게가 있고, 작은 편의점이 있었으며 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한 동네가 마음이 든 적이 있었을까.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2024년 12월 11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