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19화
“나 왔어.”
“금방 온다 카드만…. 빨리 와서 밥 무라. 근데 그건 뭐고?”
“응? 아… 이거. 엄마가 좋아하는 해질녘 커피. 밥 먹고 마셔.”
“니 그 카페에 갔드나?”
“어? 아… 그 카페에 가려고 간 건 아니고 근처에 볼일 있어서 갔다가 한번 들려봤지 뭐.”
미정은 살짝 당황하며 밥을 한 숟갈 떠 넣었다.
“그카믄 그 카페 총각도 봤겠네?”
엄마는 뭔지 모를 야릇한 눈빛으로 미정을 보며 물었다.
“어.”
“어떻드노?”
“뭐가?”
“키도 훤칠하고 말끔하드나? 미용실 말로는 눈매가 요래, 반달 엎어놓은 거 맨쿠로 축 처지가 참하게 생겼다카대.”
엄마는 양쪽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우스꽝스럽게 말했다.
“그냥 사람이지 뭐. 커피만 사 와서 제대로 못 봤어.”
미정은 엄마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반찬과 밥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와? 어데 괜찮은 총각이 있나?”
아빠는 갑자기 끼어들며 말을 보탰다.
“아… 진짜. 뭐야… 나 그냥 커피 사 온 거라고. 자꾸 이러면 나 밥 안 먹어.”
“아, 아이다. 아이다. 밥 무라.”
아빠와 엄마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아빠가 엄마에게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떨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캬… 역시 해질녘이네. 맛나네!”
엄마는 설거지를 마치고 미정이 사 온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감탄하고 있었다.
“근데 엄마는 왜 헤이즐넛이 좋아?”
“달달하다 아이가? 그렇다고 너무 달도 안 하고 적당히 달달한기 내 입맛에 딱이다.”
엄마는 어느새 헤이즐넛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갑자기 미정은 헤이즐넛 커피 컵을 벨트처럼 두르고 있는 슬리브에 눈이 갔다. 아까는 자세히 보지 못한 슬리브에는 무궁화호처럼 생긴 기차가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었고, 카페 이름 밑에 작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자주 보게 되는 사람보다, 자꾸 보게 되는 사람이길.’
미정은 이 글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퇴근했어?”
“응.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미정은 통화가 꽤 길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주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나 그 카페에 다녀왔어.”
“진짜? 어떻던데? 분위기는 괜찮아? 커피 맛은?”
“작은데 나름 잘 꾸며놨더라. 커피 맛도 나쁘지 않고.”
“그래? 의외로 괜찮은가 보네.”
“근데… 그 카페 주인 내가 아는 사람이야.”
“뭐? 어떻게?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야… 하나씩 좀 물어봐. 네가 아는 사람은 아니고…”
미정은 창화와 만나게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와… 대박… 무슨 영화도 아니고. 갑자기 웬 로맨스? 이거 완전 인연인데??”
“야, 오버하지 마. 무슨 인연이야? 그냥 우연이지. 그래서 오늘 카페에서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하다 왔어.”
“야, 그러지 말고 잘해봐. 삼촌이 그러시던데 말하는 거 보면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좋은 거 같다고.”
“됐거든? 난 연애든 결혼이든 관심 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 카페는 왜 간 거야? 그 사람인 거 같아서 갔다며?”
“그건 그냥… 긴가민가 확인 차 간 거지.”
“뭐래… 그게 그거지.”
“뭐래… 그건 그게 아니지.”
“야, 관심도 없는데 확인하러 굳이 왜 가냐?”
“야,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궁금해서 가 본 거지!”
“하이고… 퍽도! 남 일에 세상 관심도 없는 강미정이? 뭐, 일단 알겠고. 그래서 또 언제 갈 건데? 연락처는 받았어?”
“뭘 또 언제 가? 커피 마실 일이 있어야 가겠지. 그리고 연락처를 왜 받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
“야, 넌 진짜 여기서도‘아닐 미’,‘정 정’이냐?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살아보겠다는 사람인데, 자주 가서 말벗도 해주고 동네 구경도 좀 시켜주고 그래라. 그 사람도 얼마나 적적하겠냐? 아, 그리고 나 다음 달에 삼랑진 간다.”
“다음 달? 남편이랑?”
“아니. 이번엔 나 혼자.”
“왜? 같이 안 오고? 설마 싸웠어?”
“싸우긴 뭘 싸워… 싸울 힘 있으면 투잡을 뛰지. 그냥 이번엔 각자의 휴가를 즐기기로 했어. 자기만의 시간도 있어야지. 그리고 너한테 할 말도 태산이야.”
“그래. 난 찬성. 부부라도 가끔은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지.”
“아, 맞다. 너 그 카페 남자랑 뭐 없어?”
“뭐?”
“에이… 뭔가 좀 통한다거나 관심이 간다거나. 알면서 왜 이러실까? 그리고 삼촌이 그러시던데 그 남자 능력자라며? 거기 할머니 집도 다니던 회사에서 공짜로 고쳐주고…”
“뭐 없고요. 앞으로도 없을 거니까 신경 끄시고 다음 주에 보기나 하시죠.”
전화를 끊은 미정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주가 휴가를 집으로 오겠다는 것과 남편과 따로 휴가를 보낸다는 것이, 그럴 수도 있다 싶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니, 현주 말대로 손님도 잘 찾지 않는 카페에서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는 창화는 어떤 기분일까? 삼랑진역 같은 공간을 만들었지만, 정작 창화는 지금 그 공간에서 소외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나도 현주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서울에서 얼마나 더 외롭고, 쓸쓸했을까?’이런 생각까지 하니 미정의 마음이 더욱 눅눅해졌다.
미정은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삼랑진역 오막살이로 갈 요량이었다.
현주가 짚은 것처럼 창화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냥…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서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는 아무도, 미정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와 점심이라도 한 끼 하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쉽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예요.’
‘삼랑진역 오막살이’에 쉬는 날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래… 쉬면서 해야지.”
그렇게 발길을 다시 돌리려고 하는데, 미정은 갑자기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하긴, 쉬는 날이면 더 잘됐네.”
그녀는 옥탑방을 향해 창화를 불렀다. 마치 어릴 때‘철수야, 놀자!’를 외치던 것처럼.
“창화 씨! 안에 있어요?”
미정이 서너 번 이름을 부르자, 창화가 옥탑방 문을 열고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커피 사러 왔어요?”
“아, 원래는 그랬는데 쉬는 날이라고 돼 있어서, 커피 말고 다른 거 살게요!”
“일단 잠깐만요! 내려갈게요!”
창화는 옥탑에서 내려와 카페 문을 열고 미정을 안으로 들였다.
“아까 뭐 산다고 했어요?”
“아, 여기서 뭘 산다는 게 아니라 제가 밥 산다고요.”
“네?”
“오늘 쉬는 날이면 더 잘됐네요. 아직 우리 동네 잘 모르죠? 오늘 제가 동네 구경 좀 시켜줄게요. 아, 너무 갑자기라… 혹시 오늘 일 있어요? 그럼 다음에 가도 돼요.”
“아뇨. 딱히 무슨 일은 없어요. 저야 동네 구경시켜 주시면 좋죠. 올라가서 핸드폰이랑 지갑만 좀 챙겨서 올게요.”
창화는 소지품을 챙겨 신고 있던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내려와 그녀의 차에 올랐다. 그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미정에게 묻지 않았다. 미정도 창화에게 목적지가 어디인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목적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근데 창화 씨, 지금 우리 어디 가는지 안 궁금해요?”
“아뇨. 전혀요.”
“그래요? 기대감이 없어서 그런가?”
“아, 그건 절대 아니고요.”
“그럼 뭐예요? 가이드 실망스럽지 않게 대답 잘해야 해요.”
“어디로 가는 것보다 누구랑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미정 씨가 저 데리고 어딘가로 가 주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아서요.”
“오케이! 그 정도 대답이면 가이드가 실망은 안 했으니까 그럼 오늘은 제 마음대로 가 볼게요.”
미정은 미소를 띠며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와… 여기가 어디예요?”
차에서 내려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본 창화는 감탄부터 시작했다. 맑은 하늘 아래로 평평하게 펼쳐진 넓은 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는 그냥 입구예요. 설마 이 논 보여주러 왔겠어요? 저쪽이 입구예요.”
그는 미정을 따라 입구 쪽으로 걸었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하얀 솜털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정 씨, 지금 날아다니는 솜털 같은 게 뭐예요?”
“좀 성가시죠? 이게 이팝나무 꽃이에요. 보기엔 눈 내리는 것처럼 너무 예쁜데 코나 입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해요.”
마치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창화의 눈에는 하얗게 흩날리는 이팝나무 꽃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창화 씨, 여기가 밀양 위양지예요. 오래전에 저수지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크기는 크지 않지만,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도 찍었던 밀양의 명소 중 하나랍니다.”
창화는 위양지 연못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연못 위로 적당한 햇빛과 쾌청한 하늘, 그리고 이팝나무 꽃들이 날리며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을 가져다 놓은 느낌이었다. 연못에 비추어져 있는 하늘과 이팝나무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못에 담가놓은 듯, 너무도 선명하고 생생했다.
“미정 씨, 여기 정말 좋네요.”
창화는 위양지에서 정말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창화 씨가 좋다니, 다행이에요.”
그들은 위양지 둘레에 만들어져 있는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창화 씨, 위양지 처음 온 기념으로 사진 찍어줄까요?”
“아, 아뇨. 괜찮아요. 저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요? 저도 그런데. 저도 제 사진이 거의 없어요.”
“미정 씨는 왜 사진을 잘 안 찍어요?”
“그냥… 사진 찍을 때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굳이 사진으로 남기려고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은, 좋은 사람은 제 머리에, 가슴에 자연스레 남으니까요.”
“그게… 기억과 추억의 차이인 거 같아요.”
“기억과 추억의 차이… 어떻게 달라요?”
“기억은 남기고 싶지 않은 것도 남아있지만, 추억은 남기고 싶은 것만 남아 있잖아요. 그래서 전 좋게 남은 것만 추억이라고 말해요. 나쁘게 남은 건 추억이라고 하기에… 좀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이런 거 보면, 정말 창화 씨는 진짜 뼛속까지 국문학과 같다니까요.”
이팝나무 꽃이 흩날리는 위양지에서의 시간은 누가 따질 필요도 없는, 추억으로 남겨지고 있었다.
“창화 씨, 밀양에 있는 다른 카페가 본 적 없죠?”
“네, 아직이요.”
“이제 어엿한 카페 사장님인데 다른 카페도 많이 가 봐야죠. 제가 괜찮은 카페 한 군데 보여줄게요.”
위양지를 빠져나와 미정은 카페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여기에요.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인테리어도 예쁘고 넓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요.”
“와… 여긴 정말 크네요.”
온통 하얀색으로 지어진 2층짜리 카페를 본 창화는 입구에부터 놀라는 모습이었다.
“요즘 이런 촌에도 대형 카페들이 점점 많이 생기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여기가 제 동생이 카페를 차리고 싶던 자리이기도 해요.”
“동생분이요?”
“아, 제가 남동생이 있다고 얘기했었나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원래 창화 씨처럼 카페 사장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안 됐어요?”
“일단 들어가요. 커피 마시면서 얘기해 줄게요.”
창화는 미정을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 1층과 2층으로만 된 카페인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지하까지 있어 총 3층으로 만들어진 대형 카페였다. 그들은 2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제 동생은 고등학교 다닐 때인가? 그즈음부터 커피에 관심을 두더라고요. 그러더니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대학교 때는 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미정은 동생 상욱의 얘기를 창화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동생이 저희 부모님을 설득시키기는 무리였죠. 부모님은 평생 농사만 짓고 사신 분들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커피를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데다가, 이런 자리에 카페를 한다는 건 더더욱 걱정이셨어요.”
“왜요? 지금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지금은 그렇죠. 그때는 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제가 예전에 얘기했던 만어사라는 절 생각나요? 왜, 돌에서 소리가 난다고 했던.”
“아, 기억나요!”
“여기가 그 절로 가는 길목인데, 그 절이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점점 많이 찾아오게 됐어요.”
“와… 동생분이 정말 안목이 있네요.”
“그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밀어줄 걸…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 지금 동생분은 뭐해요?”
“밀양 시내 쪽에 있는 회사 다녀요. 얼마 전에 만났는데 여전히 카페에 대한 꿈은 접지 않았더라고요.”
창화는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마시더니 양손을 깍지를 낀 채, 커피잔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럼, 동생분 시간 날 때 우리 가게로 오라고 해요.”
“네? 창화 씨 가게로요?”
“네. 시간 날 때 편하게 와서 커피도 만들고, 저한테 커피도 가르쳐주면 좋죠. 어차피 가게에 손님도 많지 않으니까, 퇴근하고 와서 놀다 가라고 해요.”
“에이, 아니에요. 창화 씨 번거롭게…”
“저야말로 바리스타님께 커피도 배우고 좋죠. 안 그래도 요즘 커피가 늘지 않는 거 같아서 고민이었어요. 저는 커피 배우고 동생분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서로 좋지 않아요?”
미정은 말을 듣고 보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상욱이 했던 얘기가 계속 마음에 걸려있던 미정이었다.
“그럼, 제가 나중에 동생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정말 아무 부담 갖지 말고 와서 커피 연구한다고 생각하라고 말해줘요.”
상욱에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정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미정 씨는 동생분처럼 꿈이 없었어요?”
“아, 저요… 저는 사실 책을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서 출판사에서 일하거나,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미정 씨는 기차 안에서도 책을 읽었었네요. 그런데 왜 그쪽으로 안 갔어요?”
“좋아하는 책을 일로 만들면 좋아하던 게 일이 돼서, 싫어하는 게 될까 봐요.”
“그 말 참, 와닿네요. 좋아하는 게 일이 되는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왠지 모를 공감이 되는데요?”
“사실, 이건 듣기 좋은 핑계고요. 전 제가 쓴 글을 남들한테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남이 쓴 걸 읽은 건 너무 좋은데, 제가 쓴 걸 남들한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제가 만든 커피도, 남들한테 파는 게 부끄러우니까요.”
창화의 농담에 둘은 함께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커피 잔을 들었다.
“창화 씨는 꿈이 있었어요? 제 동생처럼, 카페 주인이 되는 거라서 카페를 연 거예요?”
“아, 카페는 제 꿈이 아니었어요. 사실 꿈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어요. 딱히 뭐가 되고 싶다거나, 뭐가 하고 싶다는 게 없었어요. 그냥… 막연하게 대기업에만 들어가자. 이런 생각만 하고 살았었어요.”
“그럼 대기업이 창화 씨의 꿈이었고, 그걸 이룬 거 아니에요?”
“아, 그렇게 되나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장래희망에 ‘회사원’이라고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하긴… 그렇네요. 저도 그런 장래희망은 쓴 적이 없어요. 그럼… 창화 씨는 꿈을 이루기보다는, 아직 꿈을 가진 적이 없으니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40대 중반에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창화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미정 씨는 어때요? 꿈을 꾸고 있는 상태예요? 아니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나요?”
“음… 저는 이제 막 다시 눈을 감았어요. 그래서 아직 앞이 캄캄해요. 좀 막막하기도 하고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미정의 상황이 창화에게 조금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다행이에요.”
“네? 뭐가요?”
커피잔을 향해 눈을 깔고 있던 미정의 눈빛이 다시 창화에게 향하며 물었다.
“꿈을 꾸려면 눈을 감아야 하고, 캄캄할수록 더 선명한 꿈을 꿀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눈 감아 보기. 잠시 눈을 감고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이 그저 경주마처럼… 뜬 눈으로 앞만 보며 내달렸거든요. 그리고 아직도 뜬 눈이에요.”
미정은 희미한 위로를 느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내려온 후로 줄곧 자신의 상황이 막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말을 듣고 보니 이 캄캄한 막막함이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 돌아볼 수 있는 지금. 지금이 있기까지 뜬 눈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잠시나마 눈 감고 있을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가 찾아왔다. 그렇게 창화의 휴일은 미정과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출판사와의 협의 결과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브런치북 연재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는 온오프라인 서점 및 전자책으로 만나보실 수 있으니 많은 사랑부탁드립니다.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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