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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Feb 09. 2018

-1을 향한 문학

정미경, <새벽까지 희미하게>, 2018, 창비

188.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1.

정미경 작가의 마지막 신작 소설집 <<새벽처럼 희미하게>>를 읽었다.

‘마지막'과 ‘ 신작' 두 단어를 나란히 써 놓고 보니 참 어색하다. 지난 일 년 동안 외면하고자 했던 작가의 죽음이 비로소 살벌하게 느껴진다.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서운했던 이번 독서. 읽으면서 참 많이 울기도 했는데, 내가 그의 작품을 많이 사랑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정미경을 처음 만난 건 2006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였지만, 그의 작품이 무슨 상을 받고 무슨 상의 후보에 오르고- 하는 문학사적 성취는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작품에 깃든 특유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의 소설에선 대체 불가한 숭고함과 기품이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인물들은 주로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속물인데도 말이다.

<<새벽처럼 희미하게>>에서 비로소 알게 된 건 그 '숭고함의 출처'다. 책의 말미엔 동료문인들과 유족의 추모산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미경은 평생 전쟁 같은 글쓰기를 해온 작가다. 그는 지하 원룸 작업실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끼니를 대수롭지 않게 거르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앞에는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나를 파괴한다.” “나의 최후를 맞으리라는 그곳에, 칼이 항복한 자를 얼마나 깊이 찌르는지 오직 나에게만 시험하도록." 같은 섬뜩한 메모들이 붙어있었다고. 마치 사방에 튄 핏자국처럼 말이다.


224.
그녀가 떠난 후 20년 가까이 쓰다 간 방배동의 그 지하 원룸에 갔을 때 문을 열면서 얼핏 화약 냄새 같은 것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 방배동 지하 원룸이야 말로 그녀의 문학적 시공간의 최전선이었다. 늘 햇볕 한 줌 안 드는 그곳으로 가야만 비장해진다고 하던 사람. 왜 문학이란 늘 비장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때로 부드러운 봄바람에 산책 나오듯, 문학이 그럴 수도 있다고는 왜 생각 못했을까. 이 좋은 세상에 왜 굳이 문학만이 제 살을 깎고 피를 말려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길들여졌던 것일까. 종국에 죽음에 일기까지 왜 그 생각을 놓지 못한 것일까. 그렇게 해서 쌓은 세월의 의미는 무엇이며 세상은 그녀에게 무슨 반향을 주었던 것일까.


이전엔 정미경이 부족함 없이 나고 자라 쉽게 글을 쓰는 엘리트, 강남 사는 사모님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내가 어리석다. 그가 얼마나 풍요롭게 나고 살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문장들 중 뭐 하나 풍요로움 속에서 쉽게 쓰인 것 같지 않은데. 정미경은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투쟁하듯 글을 쓰고 마침내 문학의 제단에 몸과 영혼을 다 바친 순교자였다. 그가 쓴 문장들의 깊이가 증거다. 그런 작가의 모습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지와 사랑>> 속 나르치스의 모습과도 꼭 닮아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는 내 무릎을 꿇리는 부분이 셀 수 없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수도자 나르치스의 모습이 묘사된 장면이다. 수도원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 골드문트는 자신과 정반대의 길, 정신수양과 신앙의 길을 가는 친구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129.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나르치스는 방문을 닫고는 예배당 쪽으로 올라갔다. 디딤돌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달그락거렸다. 골드문트는 애정 어린 눈길로 이 깡마른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복도의 저쪽 끝에서 친구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예배당 입구의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수련과 의무와 미덕의 세계가 그를 빨아들이고, 들어오기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
친구는 자신의 젊음과 가슴과 감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물로 바치고, 순종을 요구하는 엄격한 가르침에 따르지 않았던가. 오직 정신에만 봉사하고 온전히 하느님 말씀을 받드는 종이 되기 위하여! 그는 거기에 그렇게 누워 있었지. 죽은 듯이 지쳐서 다 꺼진 불처럼. 창백한 얼굴에 비쩍 마른 손으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지.


사제서품을 앞두고 온갖 세속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와 수행을 하는 나르치스의 모습은 숭고함 그 자체. 그리고 그 숭고함은 내게 애틋함으로 다가온다. 한낱 인간이 초월적인 이상이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건 자명한데, 그 불가능한 길 위에서 고통을 견디다니. 그 모습은 강인해 보이지만 안쓰러우며, 사랑스럽고도 슬프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정의가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장르에 상관없이) 처연함을 품은 것들이다. 처연함은, 슬프게도 인간의 고뇌에서 나온다. 생과 운명, 자연과 우주, 신비와 진리 등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의 고뇌 말이다. 단 한순간도 쉽지 않은,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 삶. 그리고 그들의 예술.

나르치스의 삶이 바로 '처연미' 그 자체였으며, 이번에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읽고 깨달은 바 작가 정미경의 삶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삶이 오롯이 바쳐진 소설도 마찬가지. 정미경 소설에 늘 매혹되었던 이유인즉, 그것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걸 깨닫고 더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신작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애통할 뿐이다.



2.

학부시절 작가론 수업의 과제로 정미경의 작품을 분석한 적이 있다. 여러 학자들이 쓴 평론을 짜깁기해서 “정미경 작품 속 포스트리얼리즘”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글을 써냈다. 리얼리즘이 현실의 문제 상황을 지적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포스트리얼리즘은 문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되 훈계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고 정의했던가. 정미경 소설 속 인물 중에는 유독 속물들이 많이 나온다. 작은 소비에 집착하는 이부터 돈을 너무 추구하다 못해 멸망하는 이, 질투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이, 또 부와 명예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 등 말이다.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변화, 발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소설집 <<새벽처럼 희미하게>> 속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습관적으로 뭔가를 사고 다시 환불하기를 반복하는 행위에서 안도감을 얻는 백수(<못>), 인맥 때문에 개새끼같은 친구와 계속 연을 이어가는 의사(<엄마, 나는 바보예요>), 우연히 알게 된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만 정작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지진 않는 남녀까지(<목놓아 우네>). 그들은 자신의 속물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작품을 읽는 입장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내 삶을 반추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단 교훈 따윌 얻지 않는다. 다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름이 돋을 뿐. 이런 걸 민간인사찰이라고 하나,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니까 말이다.


25.
공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좇으며 살아왔다. 자잘한 가지를 다 쳐내고 보면 그 무언가는 명료했다. 인정과 안정. 그 단순한 것이 공에겐 쉽지 않았다. 공이 닭고기 캔과 연어 캔을 줄기차게 사 들고 오는 데는 그것과 연결된 부분이 있었다. 금희는 몰랐지만. 공 자신은 알았다.


정미경 소설의 주요 특징이라고 일컫어지는 자본주의와 속물성. 예리하게 꼬집어낸 세태와 인물 묘사의 바탕에는 작가의 깊은 사유와 관찰이 있다. 무엇 하나 지레짐작해 쓴 서사나 허투루 쓴 문장이 없다. 세상 가장 투명한고 절대 녹지 않는 만년설을 갈아 만든 창, 그게 바로 정미경의 소설이다.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글쓰기에 전념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일이다.

<<새벽처럼 희미하게>> 역시 마찬가지. 정미경은 마치 투명 망토 입은 것처럼 자신을 숨긴 채 세상을 조각조각 분해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다시 쌓아 올렸다. 그의 소설 어디에도 인간 정미경의 아픔이나 행복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뾰족 날이 선 문장들이 꿰뚫은 세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3.

정미경이 추악한 인간의 심리와 현실 문제를 파헤쳤을지언정, 그게 인간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는 속물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넨다. 물론 그 위로가 여느 책에 적힌 문장들처럼 뜨겁지는 않다. 오히려 한겨울 북해도를 뒤덮은 눈처럼 서늘하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에 새하얀 눈을 손으로 한 움큼 잡아서 꼭 쥐어보면, 손에선 상대적으로 온기가 느껴지는 법. 차가운 눈덩이는 마치 뜨거운 돌처럼 주먹 쥔 손에 피를 돌게 한다, 비록 찰나이지만 말이다.

정미경의 차가운 위로도 그와 마찬가지. 소설 속 문장들은 인생 최악의 괴로움을 겪는 이들에게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따스함이 되어준다. 이건 뜨거운 위로의 말들이 수만 번 다시 쓰여도 도달할 수 없는 따스함이다.


121.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달이 떠 있던 놀이터는 줄이 한량없이 긴 괘종시계의 추처럼 예고 없이 스윽 떠오르곤 했다. 날것의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 어떤 석연치 않은 순간, 그리고 또..... 그 새벽에 송이는 서로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유석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새벽에 유석이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공항 택시를 같이 나눠 탄 인연으로 부또오 공연을 보고 문상까지 같이 가게 되는 두 남녀(<장마>). 패기 넘치게 사업을 시작했다가 전전긍긍해하는 사장과 우연히 굴러들어온 직원(<새벽까지 희미하게>). 두 작품 속 인물들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대단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된 관계 이상으론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인생의 풍파 속에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같은 천막 아래서 마주친 만남. 잠시 함께 비를 피했을 뿐인 인연. 그러나 그 뜨뜻미지근한 관계는 순간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위로가 된다. 비록 인생에서 비바람을 완전히 몰아낼 순 없지만 갑작스러운 우박으로 죽게 되진 않을 만큼의 온기가 된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깊이 통찰했던 정미경 작가. 세상에 공기보다 더 만연한 갈등과 욕망, 물질주의와 속물성을 잘 아는 그가 피처럼 뜨거운 연대와 위로 따위를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상적이고 현실성 없는 것을 무책임하게 건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이 차가운 위로는 그 어떤 말보다 지금, 오늘 이 순간에 뜨겁다.



188.
세상에 100의 빛이 있으면 -100의 어둠이 있어요. 그 어둠에 -1을 곱하면 100의 빛이 되는 거죠. 부또오는, 그 -1을 찾는 여행이라더군요.                                                                                                                                                                                


4.

어리석은 내 오해처럼, 인간 정미경의 인생이 100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가. 정미경은 세상 속 -1,000의 어둠을 꿰뚫어 보던 작가였다. 그가 투쟁하듯 찾고자 했던 것은, 제 목숨을 다 바쳐 쓰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1. 자신이 느낌 어둠을 1,000의 빛으로 만들기 위해 문학제단 앞에 순교한 것이다. 지독하도록 고집스럽게, 강인하게, 그러나 안쓰럽고 슬프게. 그래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1,000을 지나 -10,000의 어둠으로 향하는 이 세상에서 만년설의 창 같은 그의 문학이 결코 녹아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정미경을 읽을 때다. 그 어떤 오해도 없이. 차가운 위로를 느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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