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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Aug 15. 2021

반도네온, 흐느끼듯이

아니발 트로일로 Anibal Troilo

1. 반도네온의 날


지난 7월 11일은 아르헨티나에서 정한 "반도네온의 날"이었다. 12월 11일이 두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과 훌리오 데 카로Julio de Caro-의 생일에서 따온 것처럼, 반도네온의 날 역시 누군가의 생일에서 기인했다. 그는 바로 오케스트라 리더이자 작곡가, 반도네오니스트 아니발 트로일로 Anibal Troilo다.


탱고를 어느 관점에서 듣느냐에 따라 선호하는 아티스트가 갈리곤 한다. 가령 춤을 추는 이들에게 황금기의 다리엔소 D’Arienzo가 믿고 듣는 아티스트지만, 탱고 연주자들은 다리엔소가 탱고 음악을 퇴화시켰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 반대의 케이스는 피아졸라 Piazzolla. 탱고 연주자들에게 피아졸라는 절대적인 존재인 반면, 전통 탱고 옹호론자들은 피아졸라를 불호한다. 물론 개인차는 있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트로일로는 어떨까. 그는 탱고 연주자와 댄서, 그리고 리스너 모두에게 전반적으로 존경받는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그만큼 트로일로와 트로일로 밴드의 연주엔 분명 특별함이 있다.



2. 트로일로와 Época de Oro, 탱고의 황금기


아니발 트로일로는 1914년 7월 11일 태어났다. 그리고 10살 때 처음 반도네온을 접한 뒤, 1975년 5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평생 반도네온과 함께 했다. 문자 그대로 반백년을 반도네온과 함께 한 것이다. 그가 활발히 활동한 시기는 탱고의 황금기(Época de Oro)를 포함한다. 1935년부터 1952년 사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매일 밤마다 연주를 했다.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를 찾아가 춤을 췄는데, 그중에서도 트로일로의 오케스트라는 가장 인기가 많은 오케스트라 중 하나였다.

수백 개의 오케스트라 중 가장 인기를 끌었단 것은, 대중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했단 얘기다. 네박자의 정확한 마르카토, 8마디씩 나뉜 섹션, 멜로디와 리듬, 장조와 단조 등 대칭적인 구성과 그로 인한 다이내믹, 곡의 마무리를 알리는 반도네온 바리에이션 등.... 그 당시의 탱고 음악은 보편적 틀이 있었고 예측이 쉬웠다. 그 예측 가능함은 춤을 추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시 트로일로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보편성만으로 트로일로가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트로일로 오케스트라만의 특색이 있었다. 일단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상대적으로 엄청 크지 않았다. 대신 강약의 대비가 엄청났다. 오케스트라가 모두 함께 연주를 하다가도, 솔로주자가 나서는 순간 다른 멤버들은 피아니시모로 아주 작게 코드만 연주했다. 솔로 역시 아주 화려하고 큰 사운드로 연주하지 않았다. 낮은 음역대에서 심플한, 그러나 우아한 멜로디를 노래했다. 그리고 그 솔로 주자의 가운데에는 아니발 트로일로가 있었다.



3. 반도네온 왼손의 마법


그리고 무엇보다 트로일로 오케스트라는 이 전설적인 솔리스트 - 아니발 트로일로를 지녔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사실 트로일로가 테크닉이 가장 뛰어난 반도네오니스트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그에겐 소위 Feel이라는 게 있다. 타고난 감성 혹은 음악성이라고 해야 하나.

트로일로 솔로의 가장 큰 특징은 왼손의 사용이다. 피아노가 그러하듯이, 반도네온 역시 왼쪽의 키보드는 낮은 음역대를 갖고 있다. 그는 종종 왼손만으로 솔로 라인을 연주했는데, 그 심플한 멜로디는 오케스트라의 풀사운드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엄청난 다이내믹을 만들어낸다.


Anibal Troilo Orquesta - Para Lucirse

이 곡, Para Lucirse는 피아졸라가 작곡한 곡인데 피아노 - 반도네온 - 바이올린 순서대로 연주되는 솔로가 무척 아름답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오케스트라가 함께 사운드를 만들어내다가도 솔로가 연주를 할 때는 볼륨이 줄어들고, 템포 역시 느려진다. 트로일로의 반도네온 솔로는 1분 50초쯤 시작. 흥미로운 것은 반도네온 솔로 전의 피아노 솔로 역시 왼손으로만 연주한다는 것이다.


왼손 연주와 더불어 시너지를 발하는 특징이 바로 그의 프레이징 능력이다. 탱고에서 싱코페이션 (당김음)은 상시 있는 일이다. 리듬 파트가 박자를 놓치지 않고 정박을 연주하는 것과 상관없이, 솔로 주자는 멜로디를 앞서 들어가거나 나중에 들어가거나 한다. 한 박, 두 박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고, 한 마디 늦게 시작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트로일로의 싱코페이션은 그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멜로디를 엿가락처럼 늘리는데, 신기할 정도로 어색하지가 않다. 그가 멜로디를 늘리는 데 사용하는 테크닉도 귀 기울여 들으면 좋다. 네 개 정도의 낮은 노트에서 꾸밈음을 먼저 연주해 본 멜로디를 시작하거나, 한 옥타브 낮은음을 먼저 연주하고 점프하는 식의 아포자투라 (꾸밈음). 이 특징들은 그의 왼손 솔로와 함께 어우러져 곡을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탱고를 탱고답게 만든다.  


Anibal Triolo Orquesta - Danzarin

느렸다가 빨랐다가 - 춤추는 템포와 3:45쯤 시작하는 트로일로의 솔로… 피아니스트 훌리안 프라자 Julian Plaza가 작곡한 이 곡은 꽤 단순하고 전통적이다.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게 구성을 해서 이 불쌍한 화질의 영상을 보면서도 손뼉 치고 싶게 만든다.



4. 리더의 오른팔, 오케스트라 어레인저


트로일로는 본인이 직접 편곡하는 한편, 오케스트라 편곡을 멤버들에게도 맡기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두 명을 얘기하자면 우선 아스토르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어린 피아졸라는 1939년 트로일로 오케스트라의 네 번째 반도네오니스트로 데뷔하고 약 5년간 트로일로와 함께했다. 피아졸라가 편곡한 곡 중엔 Preparense 같은 본인의 자작곡과 El Monito, La Cumparsita 등 올드 탱고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피아졸라는 후에 이 시기를 “탱고의 세례를 받은 시기”라 평했으며, 밴드를 떠나서도 평생 트로일로와의 우정을 유지했다. 다만 트로일로가 그의 편곡을 아주 좋아하진 않았다고 한다. 피아졸라가 편곡한 악보를 가져가면 음표를 일단 백개는 지워버렸다고. 혹자는 이게 트로일로의 음악성 한계를 보여준다고도 말하지만 글쎄,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트로일로가 본인 오케스트라의 스타일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Anibal Troilo Orquesta - La Cumparsita (1943)


1944년 피아졸라가 밴드를 떠난 뒤, 아르젠티노 갈반 Argentino Galvan이 트로일로 오케스트라 편곡자로 부상했다. 갈반은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시에, 탱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편곡자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그가 편곡한 Recuerdos de bohemia는 특히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다. 일반적인 탱고, 특히 그 당시의 탱고가 3분 길이인 것에 반해 (때문에 피아졸라 곡 중엔 Tres minuto con realidad라는 곡도 있다. three minutes with reality란 뜻. 탱고=3분이 일종의 공식이었다) 이 곡은 무려 5분 30 초 남짓. 과하게 리드미컬한 파트도 없으며, 멜로디는 유려하고 하모니 역시 창의적이다.

갈반은 이 곡에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Debussy 느낌을 가져오고자 했다. 이는 갈반의 편곡 특징이 클래시컬하단 점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1946년, 아직 전통 탱고가 유행하던 시기. 가장 잘 나가는 탱고 오케스트라 리더 트로일로가 이 편곡을 채택한 것은 매우 대담한 도전이었으며, 그의 리더십과 음악적 센스를 보여주는 면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점은, 다리엔소 등 황금기 오케스트라와 그를 구분 짓는 점이기도 하다. 트로일로는 가장 전통적이면서 혁신적인 뮤지션이었다.

Anibal Troilo Orquesta - Recuerdos de Bohemia



5. 가사의 중요성을 알던 작곡가


트로일로에 대해 말하자면 팔만대장경이 모자랄 테지만,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쓴 곡들이다. 트로일로는 주옥같은 명곡을 많이 남겼다. 곡들이 인기를 끈 건 워낙 유명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자신의 장기를 잘 살릴 수 있는 곡을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멜로디와 다이내믹, 그리고 가사.

탱고의 가사는 시라고 불린다. 시인들은 가사를 써서 탱고의 드라마를 더욱 생생히 그려냈다. 트로일로는 여러 시인들(작사가들)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그들과 곡을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당대 제일 유명했던 가수들과 많은 녹음을 했다. 피오렌티노 Fiolentino, 로베르토 고예네체Roberto Goyeneche, 에드문도 로베로 Edmundo Rovero 등이 그중 일부다. 

Anibal Troilo Orquesta - La Ultima Curda

트로일로가 작곡하고, 카투로 카스티쇼 Catulo Castillo가 가사를 쓰고, 에드문도 리베로가 부른 La Ultima Curda. 멜로디와 가사, 목소리 모두 애절하다. 이별 후 슬프게 술에 취한 심정을 노래한 곡. 트로일로는 엄청난 주당이었다고 한다.


Lastima, bandoneón, mi corazon tu ronca maldición maleva… 
Tu lágrima de ron me lleva hasta el hondo bajo fondo donde el barro se subleva. 
¡Ya sé, no me digás! ¡Tenés razón! 
La vida es una herida absurda, y es todo tan fugaz que es una curda, 
¡nada más! mi confesión.

반도네온아, 네가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구나
저주받은 죄인의 울부짖는 소리, 럼주로 이루어진 네 눈물이
나를 역겨운 진창으로 더럽혀진 깊은 바닥으로 이끈다
나도 안다, 그러니 말하지 마, 네가 맞아
인생은 말도 안 되는 상처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짧게 머물다 사라진다는 것과,
또한 인생은, 고백하건대, 취한 상태 그뿐이라는 것도.

*주: 전부 오역임. 스페인어 못함


가수들은 모두 다른 스타일로 노래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트로일로의 프레이징처럼 노래했단 것이다. 그들은 멜로디를 잡아당겼다가 풀어놓으며 듣는 이들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까지도 트로일로의 프레이징은 반도네오니스트들 뿐만이 아니라 탱고 가수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Troilo y Goyeneche - El Motivo



트로일로가 친하게 지냈던 작사가 중 한 명은 호메로 만지 Homero Manzi로, 그는 트로일로의 대표곡 Sur의 가사를 썼다. 1951년 만지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트로일로는 일찍 우울증을 앓았다. 그리고 이후 그를 그리워하며 Responso라는 곡을 썼다. 응답이라는 뜻의 이 곡에 가사는 없다. 그러나 그 처절한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마치 김소월의 <초혼>에서 망자를 그리워하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Anibal Troilo Orquesta - Responso


6. 트로일로의 유산


뇌졸중으로 쓰러진 트로일로는 1975년 5월 19일 눈을 감았다. 평생을 반도네온과 숨 쉬고 울며 노래하던 그는 그렇게 61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그중 하나는 피아졸라다. 트로일로가 사망했을 때 로마에 있었던 그는 친구들과 눈물을 흘리며 트로일로의 곡 La Ultima Curda와 그가 종종 연주하던 Quejas de Bandoneon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트로일로를 추모하며 네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Suite Troileana를 발표했다. 피아졸라 본인이 가장 개인적인 작업이라 칭한 이 모음집은 생전의 트로일로가 좋아했던  네 가지 -  Bandoneon, Zita (트로일로의 아내), Wiskey, 그리고 Escolaso(트로일로가 즐겨하던 게임)로 제목을 하고 있다. 


Astor Piazzolla - Bandoneon 

 1분 10초쯤부터 시작. 첫 번째 파트는 완전 왼손으로만 이루어진 솔로다. 5분쯤에 La Ultima Curda를 농담처럼 연주하는 것도 일품. 밴드 구성은 피아졸라의 일렉트릭 옥텟으로 일렉피아노, 오르간, 일렉기타, 베이스, 드럼, 신시사이저, 그리고 바이올린이 반도네온에 함께한다. (트로일로가 들으면 좋아했을진..)


트로일로의 닉네임  Pichuco는 그의 아버지가 어릴 때 지어준 것으로, weeping 흐느껴 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트로일로의 앞날을 내다본 건 아니겠지만, 이만하면 트로일로는 제 이름대로 살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애절하게 탱고를 연주하며 그를 기억한다. 트로일로는 지금도 반도네온으로 숨 쉬고, 울고, 노래한다. 탱고가 존재하는한 아마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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