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장, <빌런 (Villain)>
빌런(Villain). 한 번쯤은 만나본 적 있으리라 생각한다. 악명 높은 조별 과제 팀원이나 진상 손님, 말이 안 통하는 상사 등 여럿이 머리를 스친다. 나는 히어로가 아닌데 왜 자꾸 나타나 일상을 괴롭혀대는 건지. 초능력이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것 같다.
자, 이제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자칫하면 강렬한 분노에 휩싸여 '빌런은 전부 척살하고 진정한 삶을 되찾자!'는 익숙한 권선징악의 흐름을 타게 된다. 물론 그런 감정의 정화도 유의미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조금 다른 결을 가진다.
https://youtu.be/UTPruHeUc10?si=R1lyDjQkUf9ZX19z
We all pretend to be the heroes on the good side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영웅인 척한다는 냉소적인 가사로 노래가 시작된다. 이어지는 피아노와 허밍은 장난스럽지만 웃음기가 전혀 없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떤 것은 검은색
어떤 것은 하얀색
색안경을 끼고 보면 어떡해
넌 착한 사람이고 걘 나쁜 사람이고
재미없는 너의 세상은 흑백
흑백 논리와 편향 사고를 암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지 오류인 흑백 논리는 중간이 없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편향 사고는 이미 정해둔 답에 맞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걸 따르면 '나는 무조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가 나쁜 사람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Because I'm a villain
왜 아닐 거라 생각해
아주 못돼먹은 작은 악마 같은 나인걸 몰라
All villains
왜 아닐 거라 생각해
아주 못돼먹은 작은 악마들이 우린 걸 몰라
화자는 이런 개념들을 단순히 이론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빌런'이라고 말한다.
We all pretend to be the heroes on the good side
But what if we're the villains on the other
그러니 한 번쯤 고민해 보라는 친절한 충고를 덧붙인다.
사실 이 노래는 내가 생각하는 빌런과 가장 거리가 먼 노래다. 지금껏 만나온 숱한 빌런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과 정반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검토해 볼 수 있는 능력, 즉 메타인지다. 이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면 주변 사람들을 진절머리 나게 하는 빌런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메타인지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분한다. 동시에 타인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깨닫고 왜 그런지 명확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억지나 엉뚱한 곳으로 튀는 요구사항은 이런 역량이 부족할 때 벌어진다.
메타인지가 발달되었다면 피드백 수용도 수월하기에 주변에서 부담 없이 조언을 주기도 한다. 일종의 선순환이 발생하는 셈이다. 자신의 감각과 외부의 의견을 조율해내가며 괴리를 줄여간다. 불편한 상황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메타인지는 성장하게 된다.
만약 이 글이 7월 연재분이었다면 마무리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빌런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에선 탁월한 빌런일 수 있다. 그러니 정우의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시작부터 1분까지 소리 내서 부르면서 즐겁게 퇴근하도록 하자.'
https://youtu.be/TkboeZGfXYY?si=c7mlVjgYtNNT9UKC
하지만 지금은 8월의 마지막 날이고 그 사이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몇 주간 퇴사를 고민할 정도로 심적인 한계에 몰렸다. 수면 시간이 짧아지고 극도의 불안을 느끼며 깨는 날들이 이어졌다. 꿈속에서조차 쉬지 못하게 하는 그 사람이 깨지 않는 악몽 속 빌런처럼 느껴졌다.
앞서 말했듯 나는 히어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회사에선 계속 만나야 하며 일을 함께 해야만 한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사고방식은 의외로 '나 역시 빌런이다'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빌런조차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감정적으로 몰아가려 할 때마다 단지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는 걸 되새길 뿐이었다.
각본 속에서 빌런과 히어로는 끈끈하게 엮여있는 관계다. 증오하고 다투지만 그만큼 서로를 의식해야 한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고 굳이 그 사람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줄 필요가 없다. 만일 히어로가 되고 싶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충분하다. 최고의 빌런 자리는 비워졌고 앞으로도 힘껏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