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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새결 Jun 18. 2024

알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사랑, 또는 공포

자우림, <밀랍 천사> / 카카오웹툰 <밤의 베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이 다를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다르지 않기에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애정을 측정하려 애쓴다. 오히려 사랑하는 만큼 의심을 품은 두려움도 커진다. 마치 빛과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이 나를 떠나버리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 건 아닐까.

 



https://youtu.be/C4NlCVbZ-5s?si=gJ-eCJksMyxleb_U


자우림의 <밀랍 천사>는 제목부터 기묘한 느낌을 준다. 밀랍으로 만든 천사라니. 도입부에서 점차 볼륨이 커지는 기타 리프가 다가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키며 가사가 시작된다.


오늘밤 너는 너무 근사해 보여
너무 행복해 보여 너무
오늘밤 너를 그냥 둔다면
너를 그냥 둔다면 말도 안 돼


여기까지라면 단순히 사랑하는 연인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애정 표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다소 의아한 가사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차가운 너는 나만의 천사 나만의 것
숨 쉬지 않아도 좋아
싸늘한 너는 나만의 연인 나만의 것
말하지 않아도 좋아


'차가운', '숨 쉬지 않아도', '싸늘한'에서 암시되는 것은 죽음이다. 비로소 노래의 제목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살아 있을 때의 혈색이 사라진 연인이 차가운 나의 밀랍 천사이다.

그러나 가사는 여전히 밝고 긍정적이다. 이에 동조하듯 멜로디도 가사를 따라 힘차고 경쾌하다.


오늘밤 너는 너무 완벽해 보여
너무 행복해 보여 너무
오늘밤 내게 안겨 웃어봐 내게 안겨
춤춰봐 내게 안겨
차가운 네 피부 널 만지고 싶어 만지고 싶어
싸늘한 눈동자 널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어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미칠 듯한 슬픔을 차라리 광기로 표출한다. 모든 것은 박제되었다. 더 이상 그가 떠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깊이 잠들어버린 당신은 영원히 나만의 연인이 되어줄 것이므로. 그것을 더 이상 사랑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이런 광기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항상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다 스스로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일 때, 그럼에도 애정을 갈구할 때 본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콘텐츠가 있다. 카카오웹툰 <밤의 베란다>다. 등장인물들의 치밀한 심리 묘사가 인상 깊은 작품이다. 여자 주인공 '유온'은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로 인해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을 직시하지 못한다. 학생 시절부터 함께 다니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심지어 17살 이후의 생을 상상하게 해 준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내 갈구했기에 오히려 두렵다.


한편 유온을 도왔던 '한민주' 역시 혼란스러워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분명 그를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유온이 자립할 수 있게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떠나지 못하게 묶어두고 싶어 진다. 이 마음을 차마 사랑이라 부를 수 없어서 결국 자기혐오에 빠진다.


유온을 학대하던 양아버지의 살해 사건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은 계속 엇갈린다. 분명 떠나라고 진실을 알려주었는데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옆에 있어달라고 고백했더니 떠나갈 채비를 한다. 극단으로 치닿는 감정 속에서 마침내 유온은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는다.


네가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어. 처음 느껴보는 평온함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두려움 속에서 나온 사랑 고백은 섬뜩할 정도로 증오를 닮아 있었다.

그러나 한민주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비로소 유온을 놓아준다. 이건 그에게도 익숙한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밤의 베란다>에서 단 한 번이라도 죄책감이 표현되지 않았다면 해당 콘텐츠를 소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은 이런 소유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상대방을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감정과 욕망을 또렷하게 주시하며, 현실에서 펼치는 의지와 행동과는 분리시키려 한다. '사랑해서'라는 저열한 변명 따위로 타인을 상하게 하는 모든 행위가 통용될 여지가 없도록 만든다.


이와 별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다소 위험할 수는 있지만 의식 차원에선 알지 못했던 수많은 상처와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며 환상의 원동력은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 용어로는 '투사'라고 부른다. 무의식적인 욕구들을 타인에게 덧씌우는 행위이다.


속을 알 수 없는 타인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깊은 심연은 존재하며 이곳을 탐사할수록 내면에 알지 못하는 영역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즉 나의 일부조차 내게 타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수용할 수 있다면 단지 타인을 모른다는 이유에서 오는 두려움은 줄어든다.


이제 그 사람이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았다. 불확실성을 수용할 용기가 있다면 관계의 해결은 언제나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 사람은 정말 당신을 떠나려 하고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당신이 답할 수 없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다.


뒷 이야기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가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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