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 가, 내 첫사랑 정잔디.

by 말랭자매

개인 PT를 등록했다. 하루 이틀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지치지 않고 잔디를 돌보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다녀온 첫날은 그동안 반복됐던 피로가 환기돼서 이 지루하고도 오랜 싸움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잔디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까지 생겼고, 다리 쪽 혈관을 타고 물집이 생겼다. 잔디 간병 목록에서 상처를 소독하는 일이 추가되었다. 소독약이 따가웠을 텐데도 잔디는 힘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런 나날들 속에서 운동을 시작하며 나를 다잡으려고 애썼는데, 일은 운동을 시작한 다음 날 벌어졌다.


평소처럼 빨래를 널고 있었다. 잔디는 항상 날 보고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빨래를 널러가자 날 따라왔다. 빈혈 때문에 힘들었을 잔디가 비틀비틀 힘겹게 걸어와서 날 바라보다가 갑자기 쿵-하고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서있을 힘조차 없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눈물이 터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울면서 잔디를 담요에 눕혀 놨다. 잔디는 그 후로 자리에 누워 숨만 쉬었다. 그래도 배변을 할 때는 밖에서 했었는데, 빨래 사건 뒤로 잔디는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물이랑 사료를 먹였는데도 잔디는 오줌조차 싸질 않았다. 너무 걱정이 돼서 안고 밖으로 나가서 쉬이이 하며 소리를 내줘도 잔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새벽에도 걱정이 돼서 잔디를 밖에 데리고 나가서 쉬야를 시켜봤지만 하지 않았고, 몇 시간 후에 다시 깨서 배변 패드 위에 서도록 잡아줬는데 그때 쉬야를 조금 누었다. 다음 날 잔디를 눕혀두고 운동을 다녀왔는데 잔디가 누운 채로 방석에 소변과 대변을 모두 봐놨다.


나에게 전부 처음인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잔디가 배변을 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며 또 하루를 반복하고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 잔디를 안고 침대로 갔다. 그런데 잔디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뾰족한 것에 찔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였다. 근처에 24시 병원도 없어서 밤새 뜬눈으로 잔디를 토닥였다. 오전에도 잔디는 비명을 멈출 줄 몰랐고, 주치의한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니, 병원이 차로 한 시간 넘으니 근처 병원에서 수액이라도 맞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잔디를 처음 진단받았던 동네 병원에 맡기고 나는 그동안 못했던 일을 처리했다. 밀렸던 잠도 자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집 청소도 좀 했다. 조금 쉬어서 약간 힘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약속한 시간에 잔디를 데리러 가고 있는데, 병원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전화를 확인한 것이 병원 건너편 횡단보도였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바로 뛰어 들어갔는데, 원장님이 슬픈 표정으로 날 안내했다.

잔디는 입원장 안에서 떠나고 있었다.

안돼 잔디야. 안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선생님 잔디가 진짜 간 거 맞아요? 아직도 몸이 이렇게 따뜻한데. 어떡해요. 저 어떡해요. 잘 가라는 말도 못 했는데. 잔디 가는 것도 못 지켜보고 저 어떡해요."

난 잔디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던 선생님은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빨개진 눈으로 날 안아주셨다.

잔디를 데리고 집에 와서 계속 잔디를 쓰다듬었다. 잔디를 쓰다듬는 이 느낌을 잊어버릴 까 봐 기억하려고 계속 잔디를 쓰다듬었다. 잔디의 부드러운 배에 입으로 푸우우 하며 장난치던 것도 영영 하질 못하게 됐다. 거짓말 같았다. 아직도 이렇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데, 잔디는 더 이상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죽은 뒤에는 청각이 가장 늦게 닫히는 감각이라기에 잔디 귀에 대고 마지막 전하고 싶은 말을 해줬다.

잔디야,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 잔디야 보고싶어. 보고싶어. 잔디 그동안 고생했어. 미안해. 생일도 안 보내고 가면 남겨진 내가 너무 슬퍼할까 봐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도 버텨준 거 알아. 이제 아프지마.


잔디에게 매일 불러주던 노래도 불러줬다.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예쁜 털옷을 입은 착한 잔디곰.
언제나 너를 바라보면서 작은 소망 얘기하지.
잔디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해.
어떤 비밀이라도 말할 수 있어.
까만 작은 코에 입을 맞추면,
수줍어 얼굴을 붉히는 예쁜 잔디곰.
- 동요, '예쁜 아기곰'


마지막으로 잔디의 모습을 찍어 놓았다. 지금은 간이 다 망가져서 노랗게 변했지만 여전히 내 눈엔 사랑스러운 잔디. 만지는 것도 아까운 정잔디. 잔디의 귀여웠던 부정교합 이빨. 달릴 때는 토끼처럼 뒤로 접히던 귀. 얼룩덜룩 점박이 무늬의 부드러운 배. 통통해서 만지고 있으면 기분 좋은 발바닥. 나를 보면 멈출 줄 모르던 꼬리까지 모두 다.


잔디의 털도 조금 잘랐다. 마치 그 털에 우리의 추억이 잔뜩 묻어 있어 영원히 잔디를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잔디의 흰 털, 갈색 털, 촉감이 다른 꼬리털.

점토를 사서 발바닥도 남겨놓으라던데, 난 그럴 시간이 없어서 급한 대로 종이에 잔디 발을 그려 놓았다. 잔디는 혈관염 때문에 오른쪽 뒷발이 부어 왼발에 비해 엄청 커져 있었다.

일을 마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자친구를 붙잡고 또 서로 한참을 울다가 마지막으로 잔디를 안고 잔디가 좋아하던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돌기로 했다. 산책길을 돌다가 이제는 정말 잔디 팔다리가 굳어지는 것이 느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만 잔디랑 같이 보내고 내일 아침에 보내주기로 했다.

침대 위 잔디 자리에 잔디를 눕히고 옆에 누워 잔디를 바라봤다. 잔디가 그냥 잠에 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았다. 나는 밤새 잔디에게 가지 말라고 흐느꼈다.


잔디야 잘 버텨줘서 고마워.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나랑 한 계절씩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너 없으면 어떻게 살지?

잔디야. 잘 가. 잘 가. 잔디가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간 거였으면 좋겠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어.

잘 가 내 강아지 정잔디.

keyword